21세기 디자인의 예언서, 로스러브 그로브의 Tynant 생수병

최경원 전문위원 승인 2019.11.25 14:47 | 최종 수정 2019.12.06 14:38 의견 0

머스트 아이템은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TECH 기반의 상품이 아닌 인문학적 감성이 함께 녹아든 상품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발행,편집자 주>

하나의 디자인이 디자인 역사적 흐름을 확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첨단기술이 적용된 디자인도 아니고, 고가의 명품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생활용품이 그렇게 하는 독특한 현상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예컨대 레이몬드 로위의 코카콜라 병이나 필립스탁의 레몬 즙 짜는 기구같은 디자인들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단순한 재료로 어렵지 않게 만들어진 물건이며, 지극히 평범한 기능을 하는 물건이다. 그렇지만 이전까지 디자인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면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로스 러브그로브의 티난트 생수병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큰 디자인이다. 

로스러브 그로브의 티난트 생수병

이 생수병을 살펴보기 전에 생수병 자체에 대해 먼저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생수병은 단지 물을 담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물의 상품적 가치를 시각화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생수병이다.

사실 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물질이기는 하지만 공기처럼 흔하디흔하기 때문에 상품적 가치가 매겨지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일이 역사적인 사기행각으로 지금까지도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로 금수강산을 가진 우리 문화권에서 물의 상품적 가치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물이 귀한 지역이나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는 지역에서는 물의 상품적 가치가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품적 가치는 차별에서 나오는데, 제아무리 가치가 높은 물이라고 해도 무색, 무취의 모습을 보고 그 차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물을 담는 병이었다. 담긴 것은 그저 투명한 물일 뿐이지만 그것이 어떤 디자인에 담기는가에 따라 차별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생수병의 가치는 그것을 담는 병이 은유하고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질이 높은 생수일수록 뛰어난 디자이너들의 손길을 빌려서 병의 럭셔리함을 강화하는 경우가 많다. 즉 좋은 생수들을 판매하고 있는 매대는 의외로 뛰어난 디자인들의 경합하는 장이 되고 있다.
 
이럴 경우 생수병의 디자인은 대체로 안에 들어있는 생수의 럭셔리함을 시각화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장식성이나 과장된 디자인적 기교들이 베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대부분의 생수병들은 아름다움의 극치를 지향하게 된다. 그런데 로스 그로브의 생수병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국의 산업 디자이너 로스 러브그로브가 내놓은 투명한 플라스틱 생수병을 보면 일반적인 생수병들처럼 물을 기능적으로 담을 수 있는 형태도 아니고, 럭셔리한 생수병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기교로운 아름다움을 볼 수도 없다. 

원기둥이나 육면체와 같은 조형적 질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냥 덩어리라고 해야 할 만 한 불규칙한 형태의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어떤 인위적 질서나 조형적 아름다움을 완전 결핍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생수병은 전혀 불량품이나 추한 형태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생수병의 본질적 가치를 정확하게 표현한 걸작으로 보인다. 생수병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 그냥 그대로 병이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수병의 불규칙한 형태는 생수병의 플라스틱 냄새를 완전히 벗겨내고 맑고 깨끗한 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그리이스 시대 이후로 서양 사람들이 만든 조형물 중에서, 장식적인 것들을 제외한다면, 수학적 질서를 벗어난 경우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질서야 말로 형태가 가져야 할 지존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 그것도 산업혁명의 본산인 영국의 디자이너 로스 러브그로브의 손에서 만들어진 디자인은 이렇게 그리이스 이래로 예외가 없었던 엄격한 규칙성을 한낱 생수병을 통해 완전히 벗어던져버리고 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 사회가 향했던 가치였다. 

디자이너 로스 러브그로브는 물 같은 모양의 생수병을 디자인 한 게 아니라 물을 디자인 했다. 플라스틱 같은 대표적인 공업 재료를 생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는 것은 단지 모양만 예쁘게 만드는 디자인 능력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는 그저 그런 플라스틱 생수병에 자연을 실현했고, 그것은 자신이 몸담았던 문화권의 전통적인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적극적인 몸짓이기도 했다. 

로스 러브그로브가 그저 그런 디자이너가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며, 그의 생수병 디자인은 디자인의 역사적 흐름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다. 

그의 티난트 생수병 이후로 더 이상 기하학적 형태나 장식만 가진 디자인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고,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제는 자기의 디자인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순결하고, 어떠한 형태라도 포용할 수 있고, 차가우면서도 만물을 성장시키는 그런 따뜻한 물과 같은 자연으로 만들고자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물이라고 한 사람은 춘추전국시대의 노자였다. 항상 아래로 흐르고, 남을 깨끗하게 만드는 물은 동아시아에서는 겸손과 포용의 상징이었고, 자연이 압축된 모습이었다. 이런 노자의 가르침이 영국 웨일즈 출신의 디자이너에게까지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와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진리의 힘, 본질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글 ㅣ 최경원 ,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

<필자 소개>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이자 연세대 겸임 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적 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홋’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여 운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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