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헤엄치는 고래, 필립스탁의 벽시계 “Whale"

최경원 전문위원 승인 2019.11.14 11:11 | 최종 수정 2019.12.06 14:39 의견 0

머스트 아이템은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TECH 기반의 상품이 아닌 인문학적 감성이 함께 녹아든 상품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발행,편집자 주>

필립스탁의 벽시계 '고래'

8, 90년대에 프랑스의 산업디자이너 필립스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성을 가지고 연일 히트 디자인들을 내놓았다. 물 만난 물고기는 그럴 때 쓰는 말이었다. 디자인을 내놓을 때마다 인구에 회자되고, 디자인의 흐름을 바꾸었으니 한 명의 디자이너로서 이룰 수 있는 경지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영원히 세계 디자인계를 이끌어 갈 것 같았는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그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를 대신하는 디자이너들이 대거 등장한 탓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더 이상 디자인을 하지 않고 은퇴하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더니 꽤 오랜 시간동안 그의 디자인을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은퇴설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석되어갔고, 간간이 취미활동을 하는 것처럼 디자인을 내놓기는 했다. 몇몇 작업들은 여전히 그의 솜씨가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세상이 많이 바뀐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부드럽고 은은한 매력을 가진 디자인들은 지금도 문득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가 매력적인 디자인들을 내놓으면서 부활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기기도 한다. 그냥 과거의 추억으로 남겨놓기에 그의 디자인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즈음이 되면 자연스레 회고라는 말을 머리에 떠 올리면 그의 지나간 자취를 좀 더듬어 볼 생각을 하게 된다. 워낙 뛰어난 디자인을 많이 했던 그였기에 수 많은 걸작들이 뇌리에 떠오르긴 하는데, 좀 매니아적인 시각으로 그의 디자인들을 반추해보면 연일 디자인지 지면을 장식했던 것 보다는 좀 덜 알려졌지만 한 번 쯤 더 생각을 해보아야 할 디자인들이 먼저 손에 꼽힌다. 

어렵게 구해서 지금도 서재에서 잘 돌아가고 있는 벽걸이 시계 ‘Whale'이다.

1989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난 디자인이다. 상품으로 보면 이미 라이프 사이클을 종료하고도 남을 만하며, 실제로 매장에서 구입하기도 어렵다. 이 디자인이 필립스탁의 작품들 중에서도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디자인이었던 탓도 있다.
 
형태를 보면 필립스탁 특유의 유기적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필립 스탁의 작품임을 이미 말해주고 있다. 유기적인 곡면을 이렇게 크림 스프처럼 고소하고 달달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필립스탁 말고는 없다. 그냥 봐서는 무엇에 쓰는 것인지 모르게 디자인해놓은 것도 딱 그 답다. 

시계의 몸통은 빼고 시침과 분침만으로 시계를 만들어 놓았으니 한 눈에 시계로 알아보기는 어렵다. 필립스탁 특유의 조형적 유머감각이 잔뜩 묻어나오는 형태다. 

하지만 단지 유머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시계의 이름은 ‘Whale' 즉 고래이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 모양이 고래 꼬리 같은 느낌도 들고 대양을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의 유연한 몸통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하게 고래의 모양을 이미테이션해놓은 차원이 아니라, 좀 더 시적인 형상으로 추상화해놓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계를 벽에 붙여 놓으면 잘 알 수 없다. 

몸통을 잃어버린 시침과 분침 같지만, 이 시계가 벽에 붙어서 ‘째깍 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고래라는 이름은 모양 때문이 아니라 움직임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하얀 벽 위로 유영하듯, 바늘이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너무 좋은(?) 부분들이 움직인다. 마치 어미 고래와 자식 고래가 넓은 대양을 가로지르며 우아하게 헤엄치는 것 같다.
 
벽시계라 하면 단지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격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할 만 한 시계라고 함직한데, 고래라는 이름과 물 속을 유영하는 듯 한 움직임은 단지 수사학적인, 은유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한다는 것은 좀 아쉽다. 

필립스탁은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 왜 고래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고래가 상징하는 이미지와 큰 바다 속을 조용하게, 그러나 묵직한 무게를 가지고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필립스탁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을 헤엄치는 벽시계를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이름이야 어떻게 되었든 하얀 벽에 붙어서 수시로 몸을 움직여 유영하는 이 단촐한 시계를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고래처럼 유연하게 웅대한 시간의 바다 속을 움직이고 있는 시계의 내면을 보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글 ㅣ 최경원 ,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

<필자 소개>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이자 연세대 겸임 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적 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홋’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여 운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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