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 인문학을 담다

서초구립반포도서관 인문학 강의 4 탄

박지순 발행인 승인 2019.06.13 00:00 | 최종 수정 2019.10.13 15:39 의견 0

서초구립반포도서관 인문학 특강 네번째 강의는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이자 연세대 겸임 교수로 활동중인 최경원 교수입니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적 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홋’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여 운영 중입니다. 홋의 모든 제품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개발한 패턴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을 근간으로 한 주역의 이론과 음악의 원리를 활용하여 인간의 몸과 마음을 유익하게 하는 제품들을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사동 쌈지길에 매장이 있고 유럽에도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사진=홋 홈페이지)
(사진=홋 홈페이지)

 

디자인 분야에서 왜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가를 주제로 한 이번 강의는 디자인의 정의에서 부터 출발했습니다. 

최경원 교수는 디자인의 정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디자인의 정의를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재미있는 답변이 나옵니다. 보통은 판매가 잘 되는 상품을 만드는 일이 디자인이라고 답하는데 다분히 공급자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의 시각으로 이해하니 디자인을 어떻게 해석하고 즐겨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공급자적 측면의 디자인은 기능주의적인 가치를 지향 했었습니다. 즉 값싸고 사용하기 편리한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논리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기능 및 실용주의가 디자인의 전부라고 하면 무언가 허전합니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요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자인은 그것을 즐기고 사용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정의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예로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안나 G’ 와인 오프너를 들 수 있습니다. 안나 G 와인 오프너는 여자친구가 기지개를 켜는 모습에서 착안한 것으로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려면 머리부분을 돌리고 양쪽의 팔처럼 생긴 부분을 잡아당기면 됩니다.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세워 놓으면 영락없이 머리와 팔이 달린 인형입니다.

(사진=안나 G 와인오프너)
(사진=안나 G 와인오프너)

 

최교수는 가끔 와인을 따기 위해 ‘안나 G’ 의 머리를 비틀 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든다며 묘한 매력이 있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멘디니의 다른 디자인 제품인 ‘프루스트 의자’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프루스트 의자는 기존의 엔틱한 의자에 점표 기법을 활용해서 무수한 점을 칠한 것입니다. 고전성과 현대성이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이 의자의 가격은 무려 4천만원입니다. 앉아서 생활하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의 의자이지만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좋은 사례입니다.

(사진=멘디니의 프루스트 의자)
(사진=멘디니의 프루스트 의자)

 

소비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디자인 제품이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구매하는 목적은 앞서 얘기한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예로 유명 쉐프가 운영하는 비싼 레스토랑을 가보고 그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좋은 디자인은 단순 금액적인 요소을 초월한 가치를 지닙니다.

결국 디자인에는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겨있어야 하고 그 철학은 인문학적인 소양에서 나옵니다. 뛰어난 디자이너가 한 명 탄생하려면 스포츠 선수와는 달리 수 십년 이상이 걸립니다. 왜냐하면 디자이너의 철학적인 깊이가 상품에 투영되려면 그 만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한국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몇명이나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애플의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는 검은색 터틀넥과 청바지 패션으로 유명합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검은색 터틀넥은 이세이미야케가 디자인한 것으로 잡스는 백벌 이상의 동일한 터틀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세이미야케는 일본의 패션 디자이너로 아시아 디자이너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서구에서 생각했던 옷은 입체적인 재단을 통해 여러 조각을 이어 붙이는 방식을 추구했는데 이세이미야케는 평면형태의 단지 한 장의 주름진 원단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냥 입고 보관하기 편한 옷을 만든다는 디자인 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디자인 철학은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에서 착안된 것이며 일본의 전통과 문화적인 산물이 디자인에 영감을 주고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적 산물이 전세계로 뻗어나간 사례는 위의 것을 포함하여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앞선 얘기한 기능주의적인 디자인 사조는 패션 뿐 아니라 건축의 요소에도 녹아 들어가 있는데 1958 년 완공된 뉴욕의 시그램 빌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시그램 빌딩은 미스반데어로에가 디자인한 것으로 유리와 철로 된 고층 빌딩의 전형으로 대도시의 무수한 빌딩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사조를 대변하는 것으로 서구의 넒은 부지에는 적합했지만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자연을 훼손해야 더 많이 지을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결국 이러한 고층 빌딩이 확산된 이유는 효율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사각형의 균일한 빌딩보다 동대문 DDP 와 같은 정형화되지 않은 해체주의적 건축물을 볼 때 느낌이 다른 것은 디자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답변입니다.

현시대의 디자인은 공급자가 포장해서 소비자에게 주는 일방적인 산물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문학에 근간을 둔 디자인이 진정한 의미의 '디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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