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접경도시인 브라우나우암인에서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와 어머니 클라라 히틀러의 넷째로 태어났다.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정말 못했다고 한다. 명문 중학교를 다녔긴 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기도 버겁고 애초에 공부를 죽도록 싫어하는 최하위권 학생이 이런 학교를 다니는 건 의미가 없었다. 한 번은 시험 때 하위권 성적표를 받고 화가 나서 같이 공부 못 하는 애들과 어울려 학교 근처 양조장에서 돈을 내고 밤에 폭음 수준으로 맥주를 퍼마시다가 걸려서 학교 기숙사 사감에게 큰 벌점을 맞았던 적도 있다. 결국 실업학교 중등 과정까지는 이수했으나, 고등 과정은 유급 당하다가 결국 자퇴한다.
유년기에는 수학 뿐아니라 역사 시험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부터는 역사에 관한 조예가 꽤 깊어졌다.
히틀러는 1905년, 열여섯의 나이로 예술가를 꿈꾸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던 빈으로 무작정 올라왔는데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 지원했지만 낙방하였다. 그래서 재수를 하지만 이듬해에도 떨어졌다. 방향을 바꿔 건축학과에 들어가려 했지만 수학을 못하고 실업학교 졸업을 못해 결국 포기했다.
중졸로 사회에 나오게 된 히틀러는 이때부터 방황하면서 어떠한 목표 없이 백수짓을 전전했다. 수중에 돈이 없지는 않았다. 연금을 여러개 수령했고 고모나 어머니에게 손벌리기가 일쑤였고 취미가 고급예술 감상이어서 고정지출이 많이 나갔고 그에 따라 수입이 일정치 않았다. 실생활은 상당히 쪼들리는 편이었고 이 때문에 알바도 하고 노숙자로도 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기는 했다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심도있는 예술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단순 그림엽서와 간판 그림만으로 웬만한 은행원 수준의 수익을 얻을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리 화가라는 평범한 삶을 보내던 히틀러의 인생이 여러 의미로 극적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이었다. 그는 바이에른 왕국 육군에서 복무했는데 리스트 연대에서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주위 전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반적인 병사들의 사고관과는 조금 다르게, 언제나 독일의 국가적인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는 등 현실감각이 결여되어 있는 몽상가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단 1통의 편지나 소포도 받지 못했고 술·담배도 안 했으며 남는 시간에 가끔씩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고 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에 히틀러는 군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노력했고 뭔헨의 볼셰비즘 군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19년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관여한 바이에른 군대에서 새로운 민족주의와 반 볼셰비즘 이론을 군대에 교육하는 역할을 받게 되었고, 이때 동료들 앞에서 시국에 대해 연설하면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히틀러의 탁월한 연설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능력에 기반한 나치당은 무수한 극단주의 군소정당의 하나에서 점차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또한 연설에 맞는 제스처를 효과적으로 선별하여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과 혁명 같은 독일인들이 굴욕감을 느낄 상황 변화가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1919년에 경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어수선한 시대와 상황에서 연설 능력과 강한 표현력, 고정관념에 기댄 파괴력으로 독일이 궁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자신이 제시하는 길이며, 이는 독일이 회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안이라는 확신을 전달함으로써 자기와 정치적으로 비슷한 생각을 지닌 청중을 휘어잡는 능력이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무엇이 특별했을까? 히틀러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대중의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읽고,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해라.’ ‘지도자가 신념에 찬 모습을 보이면 대중은 따른다.’ 이 무서운 이론을 히틀러는 스스로 증명했다. 한 가지 예로 그는 세상을 갈라놓은 두 이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도 모두 유대인이 만든 음모라고 설명했다.
* 참고 : 나무위키.
* 참고 및 인용 : 히틀러식 선동술[임용한의 전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