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 구조를 만드는 구독 모델의 경제학
넷플릭스나 스포티파이를 떠올리면 구독경제는 디지털 콘텐츠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기업들은 세탁기, 청바지, 사무용 가구까지 구독 모델로 제공하며 ESG 전략의 핵심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구독경제와 순환경제(Circular Economy)의 자연스러운 결합이 있다.
구독경제는 기업의 인센티브 구조 자체를 바꾼다. 전통적 제조업체들은 더 많이 팔기 위해 제품 수명을 의도적으로 제한하는 계획적 진부화 전략을 사용해왔다. 가전제품이 보증기간 직후 고장 나거나 스마트폰 배터리가 2년 만에 급격히 저하되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전통적 판매 모델에서 기업은 제품을 팔고 나면 이후 운명에 관여하지 않는다. 반면 구독 모델에서는 기업이 소유권을 유지하며 제품 전체 생애주기를 관리한다. 매출이 제품 내구성과 직결되므로, 기업은 오래 쓸 수 있고 수리 가능한 제품을 설계할 수밖에 없다.
구독 모델에서는 정반대 인센티브가 작동한다. 제품이 오래 사용될수록 유지보수 비용이 줄고 수익성이 높아지며, 고객이 장기 구독할수록 매출도 안정적으로 증가한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내구성 높은 제품 설계, 쉬운 수리 구조, 부품 재사용 가능성에 투자하게 된다.
환경적 효과는 더욱 명확하다. 원자재 채굴량 감소, 제조 과정의 탄소배출 저감, 매립 폐기물 최소화가 자연스럽게 달성된다. 순환경제의 감축, 재사용, 재활용 원칙이 비즈니스 모델 자체에 내재화되는 구조다.
글로벌 기업의 구독경제 ESG 전략
생활가전 구독(Pay-Per-Use 혁신)
네덜란드 스타트업 번들스(Bundles)는 2013년부터 세탁기를 판매하지 않고 세탁 서비스만 판매한다. 고객은 초기 비용 없이 프리미엄 밀레(Miele) 세탁기를 받고, 세탁 한 번당 약 0.30유로만 지불한다. 세탁기에는 IoT 센서가 부착돼 사용 횟수를 추적하고, 고장 나면 회사가 무상으로 수리하거나 교체한다.
핵심은 소유권이다. 번들스가 세탁기를 계속 소유하므로 수리 비용을 최소화하려 애쓰고, 일반 세탁기 수명이 7-10년인 데 비해 20년 이상 사용 가능한 내구성 높은 제품만 선별한다. 1,000명 이상의 고객 확보로 2,000대 이상의 저가 일회용 세탁기가 시장에서 사라졌고, 고객당 연간 에너지 91kWh, 물 3,000리터, 세제 10리터를 절감했다.
후발주자 호미(Homie)는 2025년 현재 시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세탁기뿐 아니라 건조기, 냉장고, 식기세척기까지 제품군을 늘렸고, 구독 기간도 6개월, 3년, 5년으로 세분화했다. 특히 네덜란드 거주 유학생, 이민자, 단기 체류 외국인을 집중 공략하며 소유 부담 없는 생활가전 시장을 키우고 있다.
국내에서도 수요는 충분하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40%를 넘어섰고, 대학가 코인세탁방이 급증하는 현상은 소유보다 이용을 선호하는 시장이 이미 존재함을 보여준다. 코웨이의 정수기 구독, LG전자의 가전 케어솔루션 같은 서비스가 성공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만 아직은 신제품 판매에 집중하고 있어, 네덜란드 기업처럼 회수-재제조-재투입이라는 완전한 순환 구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패션 구독(머드 진스(Mud Jeans)의 청바지 리스 모델)
네덜란드 브랜드 머드 진스(Mud Jeans)는 2013년 설립 때부터 청바지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Lease A Jeans 프로그램을 통해 고객은 월 구독료를 내고 청바지를 빌려 입으며, 1년 후 반납하고 새 제품으로 교체하거나 추가 비용을 내고 소유할 수 있다. 반납된 청바지는 공장으로 돌아가 분해돼 면섬유를 추출하고, 새 청바지 원료로 재사용된다.
머드 진스가 발표한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청바지 대비 물 사용량 92% 감소, CO2 배출 69% 감소를 달성했다. 2023년 기준 50,000벌 이상을 회수·재활용했고, 2025년 9월에는 스위스 섬유 인증기관으로부터 내구성, 수선 가능성, 재활용성을 공식 인증받으며 세계 최초 순환 데님 브랜드로 인정받았다. IKEA와 협업해 재생 데님으로 만든 소파 커버를 출시하는 등 순환경제 생태계 확장에도 나서고 있다.
청바지 사례는 다른 패션 카테고리로 확장 가능성이 크다. 특히 아이 옷의 경우 빠른 성장 속도 때문에 몇 달밖에 입지 못하지만, 부모들은 비싼 아동복을 구매할 수밖에 없다. 만약 아동복 브랜드가 성장 단계별 구독 서비스를 제공해 3개월마다 사이즈에 맞는 옷으로 교체해주고, 반납된 옷은 세탁 후 다음 고객에게 제공하거나 원단으로 재활용한다면 부모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기업은 고객 확보와 환경 성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
국내 기업에 던지는 전략적 과제
ESG 공시 의무화 시대를 맞아 많은 기업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제품 사용 단계와 폐기 단계의 배출량인 Scope 3는 통제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구독경제 기반 순환 모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질적 해법을 제공하는데, 기업이 제품 소유권을 유지하면 사용 단계의 에너지 효율도 폐기 단계의 재활용률도 직접 관리할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이 풀어야 할 과제를 네 가지로 꼽아보았다.
첫째, 제품을 회수하고 검수하고 재제조 시설로 운송하는 역물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분해와 재조립이 쉬운 구조로 처음부터 설계하는 철학 전환이 필요한데, 모듈형 부품, 표준화된 연결 방식, 단일 소재 사용 등이 핵심이다. 셋째, 사용량 기반 과금 모델을 설계해 고객에게 절약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도 기업에는 안정적 수익을 보장한다. 넷째, 회수율, 재활용률, 제품 수명 연장률 등을 KPI로 설정하고 추적해 Scope 3 감축 실적으로 ESG 공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이라고 주저할 이유는 없다. 사무용 가구, 유아용품, 소형 가전, 전문 공구 등 특정 제품군에서는 오히려 민첩한 중소기업이 유리하다. 대기업은 기존 판매 채널과의 갈등 때문에 구독 모델 도입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지만, 중소기업은 백지에서 시작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인식 전환은 덜 팔고 더 오래 쓰게 하는 모델도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제조업의 성공 공식은 판매량 극대화였지만, 구독경제에서 성공 공식은 고객 생애가치 극대화다. 한 번 크게 팔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래 관계를 유지하며 반복 수익을 얻는 구조다.
네덜란드의 작은 스타트업들이 글로벌 벤치마크가 된 이유는 규모가 아니라 일관성이었다. 순환 원칙을 비즈니스 모델 중심에 두고 10년 넘게 묵묵히 실행했다. 한국 기업들도 지금 시작한다면 203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과 동시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국내 기업들도 지금 시작한다면 203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과 동시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판매가 아니라 관계로, 소유가 아니라 순환으로 전환하는 기업만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든다.
[저자소개]
심준규. 경영학박사.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녹색금융으로 읽는 ESG 이야기>,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