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敎權, teachers' right)
교직에 종사하는 교원의 권리이며, 교원의 권위(權威)로 사용되기도 함. 넓은 의미로는 교육권(敎育權)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교육을 ‘받을’ 권리와 교육을 ‘할’ 권리를 포괄함. 일반적으로 교권은 교원의 교육권이라는 제한적인 의미로 사용됨. [출처 : 교육학용어사전(1995)]
2000년대 중반 교사의 체벌금지운동이 일어나고, 2010년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체벌이 금지됐다. 사실 2000년대 초반부터 교사의 체벌금지 여론이 공론화되면서 언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말이 있다. 바로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가 그것이다.
교권이란 그 정의에서도 드러나듯이 교사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신념에 따라 교육을 할 권리이자. 배울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기본권으로서 배움의 기회를 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의미한다. 그런 교권이 교사의 권위(權威, Authority)로만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정말 교권은 땅에 떨어진 것이 맞는 것일까?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하는 「교육기본통계」에 따르면 2022년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유치원 10명 초등학교 14명, 중학교 12명, 고등학교 10명 수준이다. 통계가 발표된 1980년과 비교하면 유치원 △48%, 초등학교 △71%, 중학교 △74%, 고등학교 △71% 수준으로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감소했다.
1974년 2차 베이비붐 세대 이후 인구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반면 교사 수는 계속 증가해왔다. 초등학교 교사 수만해도 1990년 14만명에서 2019년 17만명으로 약 24%가 증가했다. 따라서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80, 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필자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돌아다니기도 힘든 좁은 교실에서 50명 가까운 학생이 친구들 이름 외우기도 힘들었던 당시를 돌이켜보면, 선생님들도 학생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심지어 가정환경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나 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 중에는 성격이 거칠거나 소위 껄렁껄렁한 아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 주변에는 또 비슷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인지능력과 인격이 형성되기 시작한 그런 아이들을 선생님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체벌이었다.
그런데 과연 체벌 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든다. 체벌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교사들의 행정업무가 많았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모든 행정업무를 손으로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더 많이 필요했다. 교과과정도 지금보다 훨씬 주입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수업해야 할 분량도 많았다. 이 상황에서 많은 학생들을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체벌이었던 것이다.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줄어들고, 전산이 고도화되면서 정보공유와 행정처리도 과거보다 효율적으로 바뀌었다. 교과과정은 주입식 보다는 자율성과 창의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학생들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은 것이다’ 라고 배워왔던 구세대들에게 체벌은 거부할 수 없는 훈육이었다. 심지어 체벌을 당하고 온 학생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아이들을 체벌한 교사에게 학부모가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도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아들의 담임 교사를 폭행한 학부모에게 벌금형이 선고됐다. 2일 대구지법 형사10단독(류영재 판사)은 상해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해 5월 담임인 30대 여성 교사 B씨의 지도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교장실에서 면담을 가졌다. A씨는 교장실로 들어오는 B씨를 향해 "당신은 누구야"라고 물었고, B씨가 "담임입니다"라고 하자 갑자기 손바닥으로 왼쪽 뺨을 때렸다. 이로 인해 B씨는 전치 1주의 상해를 입었다. ["내 아들 지도 방식 마음에 안 들어"..담임 교사 폭행한 학부모 벌금 300만 원, 파이낸셜뉴스, 2023. 1. 3]
교사를 폭행하는 학부모가 생겨나는 교육환경에서 ‘스승의 매’는 더 이상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게다가 조직폭력배가 ‘의리의 사나이 집단’으로 왜곡되는 미디어의 영향과 인터넷을 통한 단체행동이 쉬워지면서 학생들의 집단폭력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 열도에서 심각한 문제로 거론되던 폭력적 집단주의 ‘이지매’가 대한민국 ‘학교폭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동료학생들에게 향하던 학교폭력이 이제는 교사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교사들에 대한 학생들의 폭력적 행위를 보상하는 보험이 등장했고, 교사들은 사비로 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2023년 교육부는 개정 「교육활동 침해 행위 및 조치 기준에 관한 고시」를 발표했다. 교원의 정당한 생활지도에 대해 의도적으로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교육활동 침해 행위로 규정하고 조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교권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개정 「교육활동 침해 행위 및 조치 기준에 관한 고시」는 교육활동 침해유형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교사에 대한 상해, 폭행, 협박, 손괴, 명예훼손 외에도 성폭력, 성희롱이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교육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학교가 이렇게 됐을까?
앞에서 교육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학생들의 변화를 언급한 바 있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람임을 감안하면 교사들도 부모들과 함께 방조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학교폭력을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싸움으로만 생각하고 말로만 훈계를 했거나, 공정하지 못한 자세로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가했거나, 아이들이 무서워서 피하기만 했기 때문에 교사들이 가해학생들에게 폭력의 명분을 쥐여준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약하고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괴롭힘이 끝나면 다음 대상은 약하고 약한 교사들이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가해학생들을 두둔하거나 명분을 제공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교사들이 되찾고자 하는 교권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교사들에 대한 학부모와 일부 학생들의 폭력행위 사례에만 몰두하면 교사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대안 밖에 나올 수 없다. 일부 교사들이 주장하려 했던 체벌권리를 되찾는 것은 이미 불가능 한 상황이 되었다. 시대에 역행할 뿐 아니라 체벌로 인한 역효과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권을 다시 세운다는 것이 체벌권리를 되찾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체벌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바탕으로 한다. 오래 전 교사의 체벌에 대해 학부모와 학생들이 수용했던 것은, 선생님은 우리 보다 많이 배우셨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학부모 학벌이 교사들보다 높아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가르침에 대해서는 학원강사, 과외선생, 온라인 교사들의 더 높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체벌을 정당화하던 근본이 무너진 상황에서 체벌은 더 이상 가르침이 아닌 교사가 저지르는 폭력과 다르지 않다.
필자의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사실 체벌은 훈육보다는 폭력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이다. 교실에서 뛰면 맞고, 숙제 안 하면 맞고, 문제를 못 풀면 맞고, 달리기 못하면 맞고, 학교에 늦으면 맞고, 성적이 떨어지면 맞고, 떠들면 맞던 시절, 심지어 선생님 기분이 안 좋아도 맞고, 선생님이 투자한 주식이 떨어지거나 선생님이 부부싸움을 하고 와도 맞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의 화풀이 대상이었고,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되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정말 일부 교사들의 일이다. Netflix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학교폭력 피해학생인 문동은(송혜교 역)에게 2차 가해를 하는 선생님은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 90년대 교사들 사이에서는 학생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문화가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되찾아야 하는 교권이 교사들의 체벌권리라면, 교권은 처음부터 없었다. 존경받는 선생님이 먼저 되고자 하는 교사가 아니라면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교권이란 것은 없었다.
우리가 학생이었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그때 우리는 어떤 선생님을 따르고, 어떤 선생님을 존경했는지 생각해보자. 돌이켜보면 체벌하는 선생님은 결코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또한 잘 가르치지 못했던 선생님 역시 존경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은 늘 고민과 함께했던 시절이었다. 학교폭력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차치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던 시절이었다. 마치 선생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실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윽박지르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선생님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던 선생님, 해답은 줄 수 없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라고 반문해주던 선생님, ‘너를 믿어’라고 말해 주던 선생님을 기억한다. 지금에 와서 그 분들이 나를 때려도 그것이 본인이 아닌 제자인 나를 위함이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권을 가진 그 분들, 나의 스승님들이 지금 무척이나 그립다.
글 | 정천 (靜天)
<필자 소개>
재수를 거쳐 입학한 대학시절, IMF 때문에 낭만과 철학을 느낄 여유도 없이 살다가, 답답한 마음에 읽게 된 몇 권의 책이 세상살이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꿔주었다. 두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고 느껴 지금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16년 차 직장인이며 컴플라이언스, 공정거래, 자산관리, 감사, 윤리경영, 마케팅 등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일년에 100권이 넘는 책을 읽을 정도로 다독가이며, 팟캐스트, 블로그, 유튜브, 컬럼리스트 활동과 가끔 서는 대학강단에서 자신의 꿈을 <Mr. Motivation>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구 출신,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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