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 놈들 전성시대(감독 윤종빈, 2012)」의 한 장면이다. 경찰서에 붙잡혀간 최익현(최민식 역)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형사의 머리를 때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어?! 내가 임마! 느그 서장이랑 임마! 어제께도! 어?! 같이 밥 묵고! 어?! 사우나도 같이 가고! 어?! 다 해쓰 임마!”
이 말을 들은 반장이 갑자기 최익현을 정중하게 대하기 시작한다. 반장은 최익현에게 사과를 하고 심지어 최익현에게 맞은 형사에게 사과하라고 명령한다.
이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는 그랬다. 내가 아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나의 지위가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도 아빠가, 삼촌이,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지 서로 자랑하는 ‘아무 말 대잔치’가 열렸다.
(아이 1) “우리 삼촌은 집에 자동차가 3대나 있어.”
(아이 2) “우리 삼촌은 집에 비행기도 있어.”
(어이 3) “우리 삼촌은 슈퍼맨이랑 친구야.”
(아이 1, 2) “우와~~ 진짜 좋겠다~~”
금세기 최고의 유행어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청년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청년은 차에서 내리며 자신을 붙잡은 경찰에게 이렇게 외친다.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경찰이 이렇게 말한다.
“왜? 너의 아빠가 누군지 엄마가 이야기 안 해줬어?”
1980년대를 지나 약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코로나로 취식이 금지되어 있는 KTX에서 햄버거를 먹던 진상녀도, 상습적으로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린 정치인 아들도, 지하철에서 노인을 폭행한 폭행녀도, 술에 취해 기내에서 승무원에게 욕하고 침을 뱉던 기업인 아들도, 우리 아빠가 누구인지 물어본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진상들의 이야기가 온라인을 타고 빠르게 퍼지면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심지어 진상들이 그렇게 자랑하던 아빠까지 고개 숙여 자식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아빠를 넘어...”너 내가 누군지 알아?”
필자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일이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문이 열리더니 2학년 선배들이 들어왔다. 선배들은 칠판 앞에 일렬로 서서 분위기를 잡더니 교내 동아리를 소개하고 가입을 권유했다. 당시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동아리 활동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배들의 말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2학년 선배의 마지막 한마디는 도시락을 먹던 우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 동아리 출신 선배들 중에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장관, 교수, 검사, 변호사, 사장까지 다양한 분들이 계십니다. 우리 동아리에 가압하면 그분들이 앞으로 여러분들의 사회생활에 든든한 ‘빽’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도 여전히 내가 아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나의 지위가 결정되던 시절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선배의 마지막 한마디는 나를 포함한 몇몇 학생들이 동아리에 가입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돌이켜보면 정말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흘러 깨달은 것이 있다. 그때 선배의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사회적 지위, 권력, 유명세를 가진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은 중요하다. 합법성과 공정성을 전제로, 인맥은 기회를 의미하며, 나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맥을 인적자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내가 아는 인적자산과 나의 수준이 같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합법성과 공정성을 전제로, 내가 가진 인적자산의 배경을 이용해서 어떤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저 얼굴을 알고, 연락처를 아는 것으로는 어떤 기회도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자신을 인적자산의 위치에 놓고 ‘나 이런 사람이야’하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위 갑질 역시 이러한 착각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잘 알고 있는 사업가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어느 정도 자격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그 사업가를 통해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험, 전공, 자격증도 없고 하다 못해 성실함조차도 없다면 그 사업가는 어떤 기회도 줄 수 없을 것이다.
p.s. 오래 전 필자에게 태극권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은 대한태극권협회 총교련 이찬 선생님이시다. 이찬 선생님은 황비홍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이연걸과 동문 사형제 관계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연걸만 보면 사숙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이런 사람이다!!!
글 | 정천(靜天)
<필자 소개>
재수를 거쳐 입학한 대학시절, IMF 때문에 낭만과 철학을 느낄 여유도 없이 살다가, 답답한 마음에 읽게 된 몇 권의 책이 세상살이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꿔주었다. 두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고 느껴 지금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16년 차 직장인이며 컴플라이언스, 공정거래, 자산관리, 감사, 윤리경영, 마케팅 등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일년에 100권이 넘는 책을 읽을 정도로 다독가이며, 팟캐스트, 블로그, 유튜브, 컬럼리스트 활동과 가끔 서는 대학강단에서 자신의 꿈을 <Mr. Motivation>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구 출신,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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