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천(靜天)의 에너지 이야기 ] 두꺼비 아저씨 비디오 가게에서 악마를 보았다

정천 전문위원 승인 2021.09.30 22:50 의견 0

두꺼비 아저씨 비디오 가게

필자가 어릴 때는 VCR((Video Cassette Recorder), 일명 비디오가 귀했다. 집에 비디오가 생기면 그 아이는 그날부터 비디오 보러 가자고 조르는 친구들의 대장이 되었다.

하루는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고 있었다. 태민(가명)이가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

“어제 아빠가 비디오 사오셨어.”

학교 끝나고 운동장 정글짐 앞에 다섯 명이 모였다. 오늘 토론 주제는 “어떤 비디오를 볼까?”였다. 지구방위대 후레쉬맨을 보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다섯 명이니 다섯 명으로 구성된 후레쉬맨을 봐야한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단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았다. 당시 비디오 한 편을 빌리는데 오백원이었다. 모아보니 천원이었다. 예상보다 많았다. 다들 재력있는 친구들이었다.

(사진 출처 : 후레시맨 카페 블로그)

집주인(?) 태민와 친구 한 명은 과자를 사서 태민이 집으로 갔다. 나머지 세 명은 비디오 가게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후레쉬맨 비디오테이프 케이스가 다 비어있었다. 모두 대여 중이었다.

“아저씨, 오늘 친구네 집에서 비디오를 보려고 하는데요. 혹시 재미있는 영화 없어요?”

영화 <쿵푸허슬>에 나온, 두꺼비 아저씨 닮은 비디오 가게 아저씨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들고 나왔다. 라벨도 붙어있지 않은 테이프였다.

“어제 아저씨가 미국에서 가져온 거야.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는 거야. 내가 특별히 빌려주는 거야.”

지구방위대 후레쉬맨도 초등학생들의 로망이자 위대한 나라 미국을 이길 수는 없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비디오테이프를 받았다.

“그런데 너희들 감당할 수 있겠니?”

친구 집에서 악마를 보았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아저씨가 준 비디오테이프는 이블데드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섭다던 <이블데드 2>였다. 그것도 무삭제판이었다. 이블데드 시리즈는 <토비 맥과이어> 주연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유명한 <샘 레이미> 감독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이다.

애쉬와 린다는 한적한 시골 오두막을 찾는다. 우연히 지하실에서 숲과 어두운 땅을 배회하는 사악한 악령을 설명하는 책과 녹음 테잎을 발견한다. 애쉬가 테잎을 틀자 그 책에 씌여 있는 악령을 소환하는 주문이 흘러나온다. 그때부터 악령이 깨어나 린다는 죽음을 당한다. 애쉬는 도망치려 했으나 돌아가는 모든 길이 이미 끊어진 상태다. 애쉬는 살아남기 위해 총과 전기톱을 들고 악령과 싸운다. 한편 또다른 일행이 이 오두막을 찾아가는데…

악령이 깨어나고, 팔다리가 잘리고,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너무 무서웠다. 비디오를 끄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텔레비전 화면 가까이 가지 못했다. 혹시 텔레비전 화면에서 악령이 튀어 나오거나 죽음의 책 저주를 받을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났다. 모두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친구 한 명이 갑자기 일어섰다. 동시에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태민이 집을 뛰쳐나갔다. 뒤에서는 태민이의 울음 섞인 절규가 들렸다.

“가지마!! 나 혼자 무섭단 말이야!!”

태민이네 집에서 우리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빨리 엄마가 보고 싶었다. 다리가 아팠지만 계속 달렸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뒤에서 악령이 잡을 것만 같았다.

울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 고요했다. 엄마가 없었다. 그래도 집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런데 거실에 걸려있던 흰 천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에 본 <전설의 고향>에서 처녀귀신이 입은 소복과 같은 색이었다. 집 밖에는 악령이 쫓아오고 있다. 집 안에는 처녀귀신이 있다. 어디로 가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집 밖에 있으면 누군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를 보자 눈물이 났다. 하지만 무서운 영화를 봤다는 말은 못했다. 다시는 비디오를 보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

우리 다섯 명은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다. 나는 꿈에서 흡혈귀 전당대회 가서 어린이 대표로 연설도 했다. 어두운 곳은 일단 피했다. 표지가 이상한 책은 악마의 책 같았다.

얼마 후부터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무서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적응에 강한 동물이었다. 대신 역효과가 나타났다. 이블데드가 너무 강했던 탓이었을까? <전설의 고향>이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이후부터는 어떤 공포영화를 봐도 무섭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어느새 호러 영화 매니아가 되어 좀비 영화만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심지어 호러 소설의 귀재 <스티븐 킹>이 소설도 거의 다 읽었다.

<스티븐 킹>

[Epilogue] 대학교 때 PC통신에서 우연히 무삭제 비디오테이프를 판다는 게시글을 보았다. 목록 안에 이블데드2가 있었다. 며칠 후에 택배가 도착했다. 젠장, 속았다. 원본인 줄 알았는데 또 복사된 비디오테이프였다. 그날 밤 불을 다 끄고 혼자서 비디오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웃었다. 어설픈 분장, 가짜 피, 너무 티가 나는 CG 등...

어린이라는 세계 그리고 어른이 된 세계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2020, 사계절)>에는 아이들의 두려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 키워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을지로에 비디오테이프 가게가 있었다.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 그 가게는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팔고 있었다. 호기심에 둘러보았다. 그 곳에 <이블데드2>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한 이 영화와 그 날의 기억. 30년도 훨씬 넘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이블데드보다 더 한 공포를 이겨내면서 지금도 여전히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글 | 정천(靜天)

<필자 소개>

재수를 거쳐 입학한 대학시절, IMF 때문에 낭만과 철학을 느낄 여유도 없이 살다가, 답답한 마음에 읽게 된 몇 권의 책이 세상살이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꿔주었다. 두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고 느껴 지금도 다른 시각으로 보는 방법을 익히는데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15년 차 직장인이며 컴플라이언스, 공정거래, 자산관리, 감사, 윤리경영, 마케팅 등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일년에 100권이 넘는 책을 읽을 정도로 다독가이며, 팟캐스트, 블로그, 유튜브, 컬럼리스트 활동과 가끔 서는 대학강단에서 자신의 꿈을 <Mr. Motivation>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구 출신,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카이스트 경영대학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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