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쟁력의 새로운 기준이 된 기후변화

2023년 9월, 슈퍼태풍 '카눈'이 한반도를 강타하며 수많은 산업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포항, 울산, 부산 산업단지의 침수로 인한 생산 중단은 국내 공급망 전체에 파급효과를 일으켰고, 기업들은 수천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불과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자연재해'로 치부되던 이러한 사건들이 이제는 '기후위기'라는 새로운 경영 리스크로 인식되고 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 문제가 아니다. 원자재 수급 불안정, 물류 체인 붕괴, 생산시설 손상, 보험료 상승 등 기업 경영 전반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특히 제조업 중심의 기업들에게 이러한 리스크는 더욱 치명적이다. 2023년 기준,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 관련 위험이 향후 10년간 최대 위협으로 꼽혔으며, 코로나19 팬데믹이나 경기침체보다 더 심각한 장기적 리스크로 평가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로벌 금융시장은 기업의 기후 대응 능력을 투자 판단의 핵심 요소로 삼기 시작했다. 블랙록, 뱅가드 같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들은 기후변화에 취약한 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있으며, 주요 연기금들도 '기후위험'을 투자 결정의 핵심 변수로 고려하고 있다. 단순한 환경보호 차원을 넘어 투자 리스크 관리의 일환이다.

기후정보공시의 등장: TCFD에서 의무화까지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TCFD(기후 관련 재무정보공개 태스크포스)다. 2015년 G20의 요청으로 출범한 TCFD는 기업이 기후변화로 인한 재무적 영향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권고하는 국제 이니셔티브다. TCFD는 단순히 환경 데이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가 기업의 재무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공개하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왜 갑자기 기후정보를 공개해야 하는가?" 많은 경영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투자자와 금융기관이 위험을 측정하기 위해서다. 극심한 가뭄으로 공장 가동이 중단될 수 있는 기업, 탄소세로 인해 생산 비용이 급등할 수 있는 기업은 명백히 투자 리스크가 크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잠재적 위험을 파악하고 투자 의사결정에 반영하고자 한다.

TCFD는 크게 네 가지 영역—지배구조, 전략, 리스크 관리, 지표와 목표—에 대한 정보 공개를 권고한다. 기업은 이사회가 기후변화 이슈를 어떻게 감독하는지(지배구조), 단기·중기·장기적으로 기후변화가 사업에 미치는 영향과 대응 전략(전략), 기후 리스크를 식별·평가·관리하는 프로세스(리스크 관리), 그리고 온실가스 배출량과 감축 목표(지표와 목표)를 공개해야 한다.

이제 이러한 기후정보공시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어가고 있다. 영국, 싱가포르, 뉴질랜드 등 많은 국가들이 이미 TCFD 기반 정보공개를 의무화했으며, 유럽연합은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을 통해 더욱 강화된 공시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26년부터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기업에 ESG 정보공개를 의무화할 예정이며, TCFD 권고사항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금융권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금융안정위원회(FSB)는 기후변화를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규정했으며, 주요 국제 은행들은 기후 정보공시를 대출 심사의 중요한 요소로 반영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산업은행, 신한금융그룹 등이 ESG 성과가 우수한 기업에 대한 우대금리 상품을 출시했다.

공급망 전체로 확산되는 ESG 정보공시

"우리는 중소기업인데, ESG 정보공시가 무슨 상관인가?" 많은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ESG는 대기업만의 이슈가 아니다.

글로벌 시장의 핵심은 '공급망 전체에 대한 투명성'이다. 삼성전자가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수천 개의 협력사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 애플, 테슬라, BMW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협력업체에 탄소 감축 목표 설정과 이행 데이터를 요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애플은 2030년까지 제품 전 과정에서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 하에 모든 협력사에 재생에너지 전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BMW는 2021년부터 공급업체 선정 시 CO2 배출량을 핵심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50년 넷제로 목표 달성을 위해 협력사들의 온실가스 인벤토리 구축과 감축 목표 설정을 지원하고 있으며, LG화학은 2022년부터 모든 신규 협력사 선정 시 ESG 평가를 의무화했다. RE100에 가입한 SK, LG, 한화 등 대기업들도 협력사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권장하는 추세다.

이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군에 해당된다. 물류업체는 운송 과정의 배출량을, 요식업체는 식자재 조달 경로의 지속가능성을, IT 기업은 데이터센터의 전력 효율성을 입증해야 한다. 이미 글로벌 물류기업 Maersk는 2023년부터 선박 연료 사용량을 공개하고 있으며, 스타벅스는 전 세계 원두 조달 과정의 탄소발자국을 추적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중소기업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위협이자 기회다. 선제적으로 준비하는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의 한 자동차 부품 중소기업은 경쟁사보다 먼저 탄소 인벤토리를 구축하고 감축 계획을 수립함으로써 BMW의 우선 공급업체 지위를 확보했다. 국내에서도 친환경 패키징을 개발한 중소기업이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의 신규 공급사로 선정된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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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인 기후 대응 전략: 중소기업을 위한 가이드

기후 정보공시는 인력과 자원이 제한된 중소기업에게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체계적인 접근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첫째, 기업별 맞춤형 기후 리스크 진단이 필요하다. 추상적인 기후위기가 아닌, 자사의 구체적인 리스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해안가에 위치한 공장은 해수면 상승과 태풍에 취약할 수 있고, 냉각수가 필요한 공정은 가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또한 탄소 집약적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같은 규제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

기후 리스크 진단은 복잡해 보이지만, 정부의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에서 제공하는 '기후변화 취약성 지도'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탄소배출 규제 영향 평가 툴'을 활용하면 기초 진단이 가능하다. 이러한 진단은 단순한 위험 회피를 넘어, 기업의 미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둘째, 데이터 관리 체계 구축이 필수적이다. ESG의 핵심은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는 경영의 기본 원칙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처음부터 완벽한 시스템을 갖출 필요는 없다. 월별 에너지 사용량(전기, 가스, 연료)을 엑셀에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연간 탄소배출량을 개략적으로 산출하고, 점차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이 효과적이다.

데이터 수집 과정에서 핵심은 일관성과 신뢰성이다. 담당자를 지정하고, 표준화된 양식을 사용하며, 주기적으로 데이터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프로세스를 수립해야 한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맞춰 중소기업용 ESG 관리 솔루션을 활용하면 데이터 수집과 분석이 더욱 용이해진다.

셋째, 외부 지원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많은 중소기업이 간과하고 있지만, 정부와 유관기관에서는 다양한 ESG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ESG 경영 확산 사업'은 컨설팅과 인증 지원을 제공하며,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중소기업 대상 온실가스 진단·컨설팅을 지원한다. 또한 지역 상공회의소에서는 정기적으로 ESG 실무자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기술 지원 프로그램이다. 기후기술센터에서는 업종별 맞춤형 저탄소 기술 도입을 지원하고 있으며, 에너지공단의 에너지진단 사업은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전문가 진단과 개선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외부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비용 부담 없이 기후 대응 역량을 강화할 수 있다.

넷째, ESG 인재 육성에 투자해야 한다. 기후변화 대응은 결국 사람의 문제다. 전담 인력 확보가 어려운 중소기업은 기존 인력 중 환경·안전·품질 관련 업무 경험자를 ESG 담당으로 지정하고, 외부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국표준협회, 지속가능경영재단 등에서 제공하는 ESG 전문가 양성 과정을 활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영진의 인식 제고다. CEO부터 ESG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핵심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ESG 최고경영자 과정'이나 산업연구원의 'ESG 경영 포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경영자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또한 ESG는 인재 유치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MZ세대 구직자들은 기업의 ESG 성과와 철학을 중요한 입사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글로벌 컨설팅 기업 딜로이트의 조사에 따르면, MZ세대의 49%가 직장 선택 시 기업의 ESG 성과를 고려한다고 응답했다. 따라서 우수 인재 확보를 위해서라도 ESG 경영은 필수적이다.

기후 대응, 비용이 아닌 투자로 접근해야

ESG는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미 많은 선도적 기업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 금속가공 중소기업은 에너지 모니터링 시스템 도입으로 전력 사용량을 15% 절감하고, 이를 ESG 보고서에 담아 산업은행의 저금리 ESG 대출(K-ESG 금융)을 받았다. 한 물류기업은 전기 배송 차량으로 전환하면서 탄소배출권 크레딧을 확보해 추가 수익을 창출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기후 대응이 비용이 아닌 투자임을 보여준다. 에너지 효율화는 운영비 절감으로 이어지고, 친환경 제품 개발은 신규 시장 진출의 기회가 된다. 또한 ESG 성과가 우수한 기업은 금융 접근성이 향상되고, 인재 유치에도 유리하다.

기후위기 시대의 경쟁력은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ESG가 새로운 비즈니스 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이를 읽지 못하는 기업은 점차 도태될 수밖에 없다. ESG 정보공시는 단순한 의무사항이 아니라, 기업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요소다.

특히 우리경제의 근간인 중소기업들이 이러한 변화를 선제적으로 수용할 때,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데이터와 인재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기후 대응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열쇠다. 변화의 물결 속에서 국내 기업들이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확보하길 기대한다.

[ 필자소개 ]

심준규. 경영학박사.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