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는 지금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국제사회의 약속은 모든 산업과 기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글로벌 규제 환경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 등 주요 경제권이 강력한 탄소 규제를 도입하는 가운데,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을 위험에 직면해 있다.
국제 정세와 기업 환경의 변화
2015년 파리협정 이후 글로벌 기후 대응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7개국이 지구 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 이하로 유지하고, 나아가 1.5℃ 이하로 제한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각국 정부는 점차 강력한 규제를 도입하고 있다.
EU는 2023년 10월부터 CBAM을 시행하여 탄소 배출이 많은 제품의 수입에 대해 추가 비용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시범 운영 기간인 현재는 보고 의무만 있지만, 2026년부터는 실제 비용이 부과된다.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수소, 전기 등이 대상 품목이며, 향후 더 많은 제품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미국은 2022년 8월 IRA를 통과시켜 청정 에너지 전환에 3,69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 법안은 전기차, 태양광, 풍력 등 청정 기술에 대한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미국 내 생산과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의 생산에 특혜를 부여한다.
이러한 글로벌 규제 환경의 변화는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EU와 미국으로의 수출 비중이 높은 철강,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등의 산업 내 중소기업들은 탄소 관련 규제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탄소배출량 스코프의 이해와 글로벌 기업의 대응
기업 활동 전 과정의 탄소 관리: 스코프 1, 2, 3
기업의 탄소배출량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 범위(스코프, Scope)로 구분하여 관리한다. 이 구분은 온실가스 프로토콜(GHG Protocol)이라는 국제 표준에 기반한다.
스코프 1(Scope 1)은 기업이 직접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배출원에서 발생하는 직접 배출이다. 공장의 보일러, 자체 발전 설비, 회사 소유 차량 등에서 발생하는 배출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기업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 측정과 관리가 비교적 용이하다.
스코프 2(Scope 2)는 기업이 구매한 전기, 스팀, 열, 냉방 등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간접 배출이다. 기업의 전력 소비가 대표적인 스코프 2 배출원이다. 재생에너지 사용이나 에너지 효율 향상을 통해 관리할 수 있다.
스코프 3(Scope 3)는 기업의 가치사슬 전반에서 발생하는 기타 모든 간접 배출로, 원자재 조달부터 제품 사용 및 폐기까지의 전 과정을 포함한다. 협력사가 부품을 생산하는 과정, 제품 운송, 직원 출퇴근, 사업 출장, 제품 사용, 폐기물 처리 등 기업 활동과 관련된 모든 간접 배출이 포함된다. 스코프 3는 일반적으로 기업 총 배출량의 70% 이상을 차지하지만, 측정과 관리가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최근 글로벌 동향은 스코프 1, 2를 넘어 스코프 3까지 관리 범위를 확대하는 추세이다. 이는 완제품 제조사가 협력사의 탄소배출까지 관리해야 함을 의미하며, 공급망 전체의 탄소 관리가 중요해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의 탄소중립 대응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적극적인 탄소중립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애플은 2030년까지 제품 제조부터 사용에 이르는 전체 가치사슬에서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로 협력업체에 재생에너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30년까지 '탄소 네거티브(Carbon Negative)'를 달성하고, 2050년까지 창사 이래 배출한 모든 탄소를 제거하겠다는 목표로 내부 탄소세를 도입해 공급망의 탄소 감축을 유도하고 있다. 유니레버는 2039년까지 제품 전체 라이프사이클에서 넷제로(Net Zero) 배출을 달성하겠다는 '클린 퓨처(Clean Future)' 전략을 통해 공급업체에 온실가스 배출량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기업들의 움직임은 공급망에 속한 중소기업들에게 탄소 감축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의 협력사가 되기 위해서는 탄소 배출 데이터를 측정하고 감축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이제 필수적인 요건이 되고 있다.
국내 정책 변화와 중소기업의 대응 방향
국내 ESG 정책 및 탄소중립 규제 동향
한국 정부는 2020년 10월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2021년 9월에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2050 탄소중립 목표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35% 이상 감축하는 중간 목표(NDC,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가 법제화되었다.
국내 ESG 관련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당초 2025년부터 시행 예정이었던 ESG 의무공시가 1년 연기되어 2026년부터 자산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적용된다. 금융위원회의 계획에 따르면, 첫 해인 2026년에는 자산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 적용되며, 2027년에는 자산 5,000억 원 이상, 2028년에는 자산 1,000억 원 이상, 2030년에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로 확대된다.
또한 국회에서는 'ESG 기본법'(가칭) 제정 논의가 진행 중이며, 정부는 기업의 ESG 경영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자금과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정부 조달과 정책 자금 지원 시 ESG 평가를 반영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어, 중소기업들은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국내 대기업들도 글로벌 추세에 맞춰 적극적인 탄소중립 전략을 수립하고 있으며, 협력사에게도 탄소 관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 공급망에 속한 중소기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 탄소 관리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
ESG 의무공시가 2026년부터 시작되지만, 중소기업들이 지금부터 탄소 관리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탄소 데이터의 측정과 관리는 단기간에 완성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한국에너지공단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이 처음 탄소 인벤토리(배출원 목록화 및 배출량 산정)를 구축하는 데는 평균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2~3년간의 데이터 축적과 검증 과정이 필요하다.
둘째, 한국거래소(KRX)가 2021년 발표한 'ESG 정보공개 가이던스'에 따르면, 탄소 배출량 보고 시 최소 3년간의 데이터를 제시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는 기업의 탄소 배출 추세와 감축 노력을 평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2026년 의무공시에 대비하려면, 2023년부터 데이터를 측정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셋째, 대기업 및 글로벌 기업과의 거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미 지금부터 탄소 데이터 관리가 필요하다. 대기업들이 2026년 ESG 의무공시에 대비하여 협력사에게 탄소 데이터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준비되지 않은 중소기업은 거래 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넷째, 정부의 정책 자금 지원과 조달 과정에서 ESG 평가가 강화되고 있다. 한국산업은행과 중소기업은행은 ESG 채권과 대출을 통해 저금리 자금을 제공하고 있으며, 중소벤처기업부는 'ESG 경영 확산 사업'을 통해 중소기업의 ESG 경영 도입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ESG 평가 대응이 필요하며, 탄소 배출 관리는 그 중요한 부분이다.
중소기업의 현실적인 탄소중립 준비 방안
중소기업이 탄소중립을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과도한 부담 없이 현재 여건에서 실행 가능한 수준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기보다는, 기업의 일상적인 운영 데이터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인 첫걸음이다.
실질적으로 많은 중소기업들은 이미 탄소중립과 관련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전기요금, 가스요금, 용수 사용량, 원자재 구매내역, 폐기물 처리 비용 등 일상적인 경영활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가 바로 탄소 관리의 기초가 된다.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가 탄소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선 필요한 것은 기업이 현재 어떤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탄소중립 대응을 위해 추가로 어떤 데이터가 필요한지 스캐닝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외부 컨설팅을 즉시 도입하기보다는, 먼저 자사에 적합한 탄소관리 방향성을 검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무료 교육이나 간단한 진단 프로그램을 활용해 초기 방향성을 설정한 후, 필요에 따라 단계적으로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비용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다.
각 기업마다 사업 환경과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표준화된 접근법보다는 기업에 맞춘 가용범위 내에서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제조업의 경우 생산 공정별 에너지 사용량을, 서비스업의 경우 사무실 운영에 따른 에너지 사용량을 우선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 경영진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직원들의 업무 부담이다. 이미 본연의 업무로 바쁜 직원들에게 탄소 관리라는 새로운 업무를 갑자기 부여하면 저항과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초기에는 탄소 관리의 필요성과 방향성을 공유하고, 기존 업무 프로세스에 자연스럽게 통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구매팀은 이미 원자재 비용을 관리하고 있는데, 여기에 주요 원자재의 탄소 발자국 정보를 점진적으로 추가하거나, 시설관리팀이 관리하는 에너지 사용량 데이터를 탄소 배출량으로 환산하는 간단한 과정을 도입할 수 있다. 이렇게 기존 업무 흐름에 자연스럽게 탄소 관점을 통합하면, 직원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탄소 관리의 기반을 다질 수 있다.
탄소중립은 모든 기업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 특히 중소기업에게는 준비 기간이 더욱 중요하다. 2026년부터 시작되는 ESG 의무공시는 직접적으로는 대기업에게 적용되지만, 공급망을 통해 중소기업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이라면, 또는 국내 대기업과의 거래를 중요시하는 기업이라면, 그리고 향후 규제 환경의 변화에 대비하고자 하는 기업이라면, 지금부터 탄소 데이터 측정과 관리를 시작해야 한다.
결국 중소기업의 탄소중립 준비는 거창한 목표나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라, 현재 가진 자원과 데이터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간단한 스캐닝과 첫걸음을 내딛는 결단이다.
[ 필자소개 ]
심준규. 경영학박사.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