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S(탐스) 신발을 기억하는가. 2000년대 중반 '한 켤레를 사면 한 켤레를 기부한다'는 메시지로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브랜드다. 착한 소비의 아이콘이었지만, 곧 비판에 직면했다. 무료로 신발을 받은 아프리카 지역의 신발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현지 경제가 타격을 받았다. 선의가 오히려 의존성을 키운다는 지적이었다.
2008년, 와튼 경영대학원 입학을 앞둔 한 학생이 태국 여행 중 안경을 잃어버렸다. 귀국 후 새 안경을 사려니 가격이 800달러에 달했다. 당시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아이폰보다 비쌌다. 안경 산업은 소수의 대기업이 제조부터 유통까지 장악한 상태였다.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며 가격이 폭등하는 구조였다. 원가가 10~20달러에 불과한 안경테가 소비자에게 수백 달러에 팔리는 현실에 분노한 그는 경영대학원에 진학한 뒤 세 명의 동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왜 안경을 온라인으로 팔지 않는 거지?" 2010년, 네 명은 워비파커(Warby Parker)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겉보기엔 TOMS의 안경 버전처럼 보였다. 실제로 'Buy a Pair, Give a Pair'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2024년 두 회사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TOMS가 재정 위기를 겪으며 소유권을 채권자들에게 넘기는 동안, 워비파커는 연 매출 1조원, 기업가치 2.4조원의 상장 기업으로 성장했다. 무엇이 달랐을까. 그 차이 속에 임팩트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지속가능한 소셜벤처'의 본질이 숨어있다.
한중간 유통을 없애고 생태계를 만들다
워비파커의 전략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비즈니스 모델의 혁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미션의 재설계였다. 먼저 비즈니스 측면을 보자. 중간 유통 단계를 모두 없애고 직접 판매하면서 품질은 유지하고 가격은 95달러로 낮췄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안경을 판다는 발상 자체가 당시로서는 혁신이었다. 소비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안경은 직접 써봐야 아는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홈 트라이온(Home Try-On)'이었다. 5개의 안경테를 집으로 무료 배송한 뒤, 소비자가 일주일간 착용해보고 마음에 드는 것만 구매하게 했다. 고객들은 자발적으로 SNS에 착용 사진을 올리며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바이럴 마케팅이 자동으로 작동했다. 첫 해 판매 목표를 3주 만에 달성했다. 대기자 명단은 2만 명을 넘어섰다. 독점 구조로 경직된 안경 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셜벤처로서 진짜 차별화는 사회적 미션에 있었다. 워비파커도 안경 한 켤레를 팔 때마다 한 켤레를 기부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TOMS와 같아 보였다. 그러나 작동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TOMS는 신발을 직접 무료로 나눠줬다. 워비파커는 VisionSpring 같은 NGO에 자금과 안경을 지원해 개발도상국의 현지인들을 교육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소상공인이 되어 안경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했다. 단순히 주는 대신, 스스로 돌아가는 경제 생태계를 만든 셈이다.
차이는 명확했다. TOMS의 무료 신발은 현지 신발 가게의 경쟁자였지만, 워비파커의 모델은 현지 안경 판매상의 공급자였다. 전자는 시장을 파괴했다. 후자는 시장을 만들었다. 2024년까지 80개국 이상에 2,000만 개의 안경을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TOMS가 비판받고 워비파커가 주목받는 결정적 이유다.
투자자들이 주목한 세 가지 신호
전통적 투자자들은 워비파커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수익률만 보자니 사회공헌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소셜벤처로만 보자니 성장성이 너무 좋았다. 벤처캐피털은 빠른 수익을 원했다. 재단은 비영리 모델을 선호했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바로 '임팩트 투자'다.
임팩트 투자는 재무적 수익과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투자 방식이다. 글로벌 임팩트 투자 네트워크(GIIN)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전 세계 3,907개 조직이 1조 5,710억 달러(약 2,100조원)를 운용하고 있다. 2019년 이후 연평균 21%씩 성장하는 시장이다. 워비파커는 이 새로운 투자 시장의 모범 답안처럼 보였다. 투자자들이 주목한 건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측정 가능한 임팩트였다. 워비파커는 매년 Impact Report를 발간하며 정확히 몇 개의 안경을 기부했는지, 몇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는지 데이터로 공개했다. 막연한 '착한 기업' 이미지가 아니라 숫자로 증명했다. B-Corp 인증과 Public Benefit Corporation 지위를 획득하면서 제3자의 검증까지 받았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리스크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생겼다.
두 번째는 사회적 미션이 비용이 아니라 경쟁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고객 만족도(NPS)가 83점으로 업계 평균 30점을 압도했다. 직원들이 회사에 입사하려는 가장 큰 이유도 사회적 미션이었다. 인재 유치 비용이 절감됐다. 이직률이 낮아 교육비가 줄었다. 브랜드 충성도가 높아 마케팅 비용 대비 효과가 컸다. ESG가 지출이 아니라 자산으로 기능했다.
세 번째는 시장 파괴력이었다. 독점 구조로 경직된 2,000억 달러 규모 안경 시장에서 7%의 점유율을 확보했다. 2018년 기업가치 12억 달러로 평가받으며 2021년 나스닥에 상장했다. 2024년 매출은 7억 7,1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15% 성장했다. 순손실은 2022년 1억 1,000만 달러에서 2024년 2,000만 달러로 급감하며 흑자 전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워비파커는 소비자에게 사회적 미션을 크게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여느 기업처럼 처음에는 홈페이지 첫 화면에 기부 프로그램을 띄웠다. 하지만 실제 고객들은 스타일과 가격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은 별도 페이지로 옮기고 대신 직원과 투자자에게는 사회적 미션을 최우선으로 강조한다.
소비자는 좋은 제품을 원한다. 인재와 자본은 의미있는 일을 원한다. 그 본질을 꿰뚫은 전략이다.
한국 기업이 배워야 할 본질
워비파커의 성공이 한국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ESG는 비용이 아니라 기회다. 단, 방식이 중요하다.
첫째, 기부를 넘어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TOMS와 워비파커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다는 오래된 격언처럼, 지속가능한 변화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삼성전자가 협력사에 친환경 기술을 전수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같은 맥락이다. 단순히 돈을 주는 대신, 협력사가 스스로 ESG 역량을 키우도록 돕는다. 공급망 전체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지면, 궁극적으로는 삼성 자신의 경쟁력도 강화된다.
둘째, 투명하게 측정하고 공개해야 한다. 막연한 "친환경", "사회공헌"은 그린워싱 의혹만 키운다. "탄소배출 30% 감소", "협력사 100곳 ESG 인증 지원" 같은 구체적 수치가 신뢰를 만든다. 특히 임팩트 투자 자본을 유치하려면 더욱 그렇다. 투자자들은 재무제표를 보듯 임팩트를 본다.
셋째, 비즈니스 모델에 내재화해야 한다. 본업과 무관한 CSR 활동은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삭감되는 예산이다. 네이버가 데이터센터에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건 환경보호인 동시에 장기적 에너지 비용 절감이다. 쿠팡이 물류센터를 친환경으로 설계하는 건 운영비 절감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충돌하는 게 아니라 중첩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임팩트 투자 시장의 성장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유럽에서는 2024년부터 5만 개 기업에 ESG 감사 보고서 제출이 의무화됐다. 미국과 아시아도 비슷한 규제를 준비 중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자산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는 2025년부터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제출이 의무화된다. 규제를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규제를 최소한으로 맞출 것인가, 아니면 경쟁력으로 만들 것인가의 선택만 남는다.
워비파커는 착한 기업이 아니라 똑똑한 기업이다. 사회적 가치를 마케팅 슬로건이 아니라 비즈니스 모델의 DNA에 심었다. 그 결과 소비자는 더 나은 제품을 얻었다. 직원은 의미 있는 일자리를 얻었다. 투자자는 지속가능한 수익을 얻었다. 사회는 실질적 변화를 얻었다. 한국 기업들도 이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2,100조원의 임팩트 투자 자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 돈은 워비파커 같은 기업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저자소개]
심준규. 경영학박사.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