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이 농산물이 연간 5조 원 규모로 폐기되는 현실은 이제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문제를 직거래 플랫폼으로 해결하는 시도들이 성과를 내면서, 버려지던 자원이 비즈니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성공 요인이 첨단 기술이나 막대한 자본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을 다시 보는 시각'이었다는 점이다.
로컬 ESG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글로벌 기준에 맞춰 복잡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대신, 발 딛고 선 지역에서 저평가된 자원을 재발견하는 것. 못난이 농산물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지역 곳곳에는 주목받지 못했거나, 산업의 경계 때문에 활용되지 못하던 자원들이 있다. 폐기되는 부산물, 판로를 잃은 특산물, 다른 산업에서 쓸모없다고 여겨지던 소재들. 관점을 바꾸면 이 모든 것이 비즈니스 기회가 된다. 환경을 보호하고 지역 경제를 살리면서 수익을 만드는, 로컬 ESG의 가능성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경계를 지우면 폐기물이 원료가 된다
천안의 한 화장품 제조사는 독특한 원료를 사용한다. 맥주 공장에서 나오는 맥주박, 제주 농가의 감귤껍질, 녹차 밭에서 나온 차 부산물이다. 원래는 전량 폐기되던 것들이다. 특수 공정을 거쳐 이것들을 화장품 원료로 재탄생시킨다. 맥주박으로 만든 스킨케어 제품은 이미 시장에서 반응을 얻고 있고, 감귤과 녹차를 활용한 제품도 개발 중이다. 심지어 제주 바다를 더럽히는 괭생이모자반까지 활용 방안을 연구한다.
비슷한 사례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강릉에서는 못생긴 감자로 감자칩을 만들고, 통영에서는 굴 껍데기로 친환경 소재를 생산한다. 포항에서는 수요가 줄어든 돌미역을 육포처럼 가공해 전혀 새로운 제품으로 내놓았다. 공통점이 있다. 산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이다. 식품 산업의 폐기물이 화장품 산업의 원료가 되고, 농업의 부산물이 제조업의 재료가 된다. 한 산업의 쓰레기는 다른 산업의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런 접근이 가능해진 이유는 기술의 발전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사고방식의 전환이 더 중요하다. 자사의 제조 공정만 들여다보면 폐기물은 그저 처리해야 할 골칫거리다. 시야를 넓혀 다른 산업까지 보면 달라진다. 우리에게 쓸모없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원료일 수 있다. 반대로 다른 곳에서 버려지는 것을 우리가 활용할 방법도 있다. 제빵 공장의 밀기울을 수거해 대체 밀가루로 만들어 다시 빵 원료로 공급하는 사례도 있다. 같은 산업 안에서도 순환이 가능하다.
문제는 이런 연결고리를 혼자 만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화장품 제조사가 맥주 공장의 폐기물 발생 시점과 양을 파악하고, 수거 시스템을 구축하고, 원료화 기술까지 개발하려면 상당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협력이 중요하다. 지역 대학 연구소와 원료화 기술을 공동 개발하거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테크노파크에서 설비를 지원받는 방식이다. 실제로 정부는 산학협력과 R&D 지원 사업에 상당한 예산을 배정하고 있다. 자원은 있다. 찾아서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다.
로컬 네트워크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
파리바게뜨 매장에 가면 강원 평창 감자, 제주 구좌 당근, 경북 영주 풍기인삼을 활용한 빵을 볼 수 있다. 뚜레쥬르 식빵에는 밀가루 제분 과정에서 나온 밀기울을 재가공한 원료가 들어간다. 대기업들이 지역 특산물과 업사이클링 원료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ESG 경영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비자 반응이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역 상생', '자원 순환'이라는 스토리가 제품 차별화 포인트가 된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대기업이 이런 원료를 직접 조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국 각지의 농가를 일일이 관리하거나, 소량 발생하는 부산물을 수거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지역 네트워크를 가진 공급자를 필요로 한다. 지역 농가와 신뢰 관계를 맺고, 품질을 관리하고, 안정적으로 수급할 수 있는 업체. 규모는 작아도 지역에 뿌리내린 기업이 할 수 있는 역할이다.
실제로 한 지역 식품 가공업체는 못난이 농산물을 전문으로 수매해 대형 급식업체에 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농가 입장에서는 폐기하던 농산물에 판로가 생기고, 급식업체는 원가를 절감하면서 ESG 스토리를 확보한다. 가공업체는 그 사이에서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했다. 거창한 기술 없이도 지역 네트워크와 신뢰만으로 만들어낸 비즈니스 모델이다.
이런 구조가 작동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지역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어느 시기에 어떤 농산물이 과잉 생산되는지, 어느 공장에서 어떤 부산물이 나오는지 파악하려면 현장을 다녀야 한다. 둘째, 품질 관리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못난이 농산물이라도 신선도와 안전성은 보장해야 대형 거래처가 받아준다. 셋째, 작게 시작해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지역, 한 품목으로 파일럿을 운영하고 성과를 증명한 후 확대하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전국 단위로 덤비면 실패 확률이 높다.
지금 시작할 수 있는 로컬 ESG
로컬 ESG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우리 회사 반경 50km 이내에 어떤 자원이 버려지고 있는가?"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과잉 생산되는 농산물, 판로를 잃은 특산물, 인근 공장에서 나오는 부산물. 가까운 곳에 기회가 있다. 지역 농협, 중소기업협회, 지자체 담당자를 만나면 의외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무실에 앉아 계획만 세우지 말고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실행은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 품목, 한 지역으로 파일럿을 시작해 보는 것이다. 맥주 공장 부산물을 활용한 화장품 원료도 소규모 실험에서 시작했고, 굴 껍데기를 친환경 소재로 만든 사례도 작은 시도에서 출발했다. 처음부터 전국 단위로 덤비면 실패 확률이 높다. 지역 한 곳에서 성공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복제해 확장하는 전략이 현실적이다. 실험하고, 검증하고, 확대하는 과정을 거쳐야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가 된다.
로컬 ESG의 진짜 가치는 경쟁 구도를 바꾼다는 데 있다. 글로벌 기업과 같은 규모로 경쟁할 수는 없지만, 지역 네트워크에서는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지역 생산자와의 신뢰 관계,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 빠른 의사결정. 규모는 작아도 지역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 대기업이 지역 상생 전략을 펼칠 때, 지역 자원을 확보하고 관리할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바로 그 자리가 기회다.
대기업들은 협력사에 ESG 대응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유럽 시장은 탄소 배출에 비용을 부과한다. 글로벌 기준을 충족하기 어렵다면, 로컬 ESG로 관점을 바꾸어 살펴보길 추천한다. 지역 자원을 활용해 폐기물을 줄이고, 지역 주민과 협력해 일자리를 만든다. 거창한 시스템 없이도 환경(E)과 사회(S)를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임팩트를 측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할 때, 대기업의 협력사로 인정받고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버려지는 것을 다시 보고, 산업의 경계를 넘어 연결하고, 지역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것. 로컬 ESG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맥주 공장 폐기물이 화장품 원료가 되고, 굴 껍데기가 친환경 소재가 되고, 못생긴 감자가 새로운 제품이 되는 사례들은 모두 이 원칙에서 출발했다. 특별한 기술이나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관찰하고, 연결하고, 실행하는 용기만 있으면 된다.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길, 로컬 ESG는 지금 시작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필자소개]
심준규. 경영학박사.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겸임교수.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