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onysian 전문위원
승인
2019.02.25 00:00 | 최종 수정 2138.07.06 00:00
의견
0
외부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은 원필자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원문 그대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주>
오전 11시. 어둠 속에서 그들의 몸놀림이 다급해진다. 조금 있으면 점심시간과 맞물려 지하철 이용객이 늘어나는 상황. 최대한 빠른 시간 내 스크린도어 오작동을 해결해야 한다.
몇년 전, 혼자 일하던 외주직원이 사고사한 이후 2인 작업체계가 수립되기는 했지만, 그 이외 여건들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나마 끊임없이 (외주직원 위주의) 사고가 이어지는 다른 기업들의 작업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양호한 환경인지도 모르겠다.
2018년 세밑. 오랜 진통 끝에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김용균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나마 여야간의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면서 최초 상정된 개정안 대비 많은 부분이 배제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에 앞서 최종 확정된 2019년 정부 예산안에서 사회간접자본 예산이 늘어난 대신에, 청년 일자리 창출사업을 포함한 각종 고용/복지 관련 항목이 1조2000억 원 감소한 것을 보면 정책의 일관성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초과세수가 예상되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기는 하지만.
3년전. 홀로 구의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20대 외주직원이 사고로 숨지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의 지원이 부족해 자신의 부담으로 병원비를 부담하는 소방공무원들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이들이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대의에 공감했다.
이후 수많은 이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고, 보다 개명한 세상에 대한 열망도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뜨거운 함성이 잦아들고 새 정부가 들어선지도 두 해가 지나간 지금, '무엇보다 사람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최저임금을 포함한 소득주도성장 논쟁 속에 함몰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전과 같은 안타까운 사고도 다시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지금의 국면은 성장과 분배, 어느 쪽이 중요하냐는 오랜 사회적 갈등구조에서 한 치도 진전되지 못한 상황인 것 같다. 20세기 중에 세계 어느 나라도 달성하지 못한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자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성장이 충분하지 못해 미래가 어둡다는 상반된 주장들이 떠돈다.
오히려 그런 급성장의 경험과는 거리가 먼 국가들이 사회적 분배에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분배는 성장의 비례함수라기보다는 정책적인 의지의 문제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
사실 ‘성장’과 ‘분배’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성장은 결국 분배라는 궁극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절차일 뿐인데, 목표보다 절차가 중요하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얻기 어렵다. 하다못해 펀드 투자자들을 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투자회수액의 극대화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만약 어떤 펀드가 지속적으로 우수한 실적을 내고 성장세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관련한 수익 실현이 수십년 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면 철저한 시장논리의 관점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다. 영화펀드가 붐을 일으킨 데서 보듯, 오히려 수익규모는 다소 작더라도 이른 시일내에 투자회수가 가능하여 ‘유동성’의 관점에서 유리한 펀드가 더 각광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최소한의 시장원리는 물론 적극적인 분배정책과도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소득주도성장을 미세먼지만큼이나 유해한 것으로 몰아가는 정계, 학계, 언론의 십자포화 속에, 한때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였던 ‘사람의 가치가 최우선’이라는 명제는 다시금 어둠 속에 묻히는 추세다.
밤보다 암울한 그들의 낮이 그렇게 깊어간다.
글ㅣDionysian, 칼럼니스트
<필자 소개>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외환위기 이후 다수의 구조조정 업무에 관여했다. 현재는 기업 건전성 평가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접하고 결국 본인이 속한 조직 또한 구조조정에 직면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현대 자본주의와 우리 사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다각적으로 성찰할 필요를 절감했다. 오래전 접었던 언론인의 꿈을 다시 들춰내 보는 중이다.
저작권자 ⓒ 머스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