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왔다. 아직 꽃샘 추위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지만, 젊음이 가득 찬 대학 캠퍼스는 날씨와 상관없이 에너지가 넘쳐나고 있다. 따뜻한 봄이 돌아 왔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3월 캠퍼스의 싱그러움을 만드는 것은 신입생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또한 그 상큼한 호기심을 자랑스러운 소속감으로 1차 가득 채워 주는 일명 ‘과잠(OO학과 jumper)’의 행렬도 새 봄의 캠퍼스를 대표하는 싱그러운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 날 대학 ‘과잠’의 대표 디자인은 ‘바시티 재킷’이다. 바시티 재킷 (Varsity Jacket)을 직역하면, 대표팀 재킷이라는 뜻이다. 과연 어떻게 바시티 재킷이 탄생하였고, 어떻게 학생들의 대표 유니폼이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바시티 재킷의 기원은? 레터맨 스웨터!
‘바시티 재킷’의 기원은 1865년 메사츄세츠 캠브리지 (Massachusetts Cambridge)에 있는 하버드 대학의 야구 선수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정 팀을 나타내는 이 유니폼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서티 재킷과 확연히 다르다. 하버드대 야구팀 코치들은 우수한 선수들을 구별하고 그들의 경기 성적에 대해 보상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두꺼운 회색 플란넬 양모 스웨터를 만들어 학교 이니셜인 ‘H’를 가슴 중앙에 장식하였고, 이 스웨터를 받은 사람을 ‘letterman’이라고 불렀다. 이에 선수들은 스웨터를 받기 위해 경쟁하였고, 이는 그들의 경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letterman’의 사전적 의미는 ‘스포츠에서 어느 수준의 업적을 달성했거나 일정량의 경기에 참여한 대학 운동가로서, 대학의 이니셜이 새겨진 옷을 수여 받음’이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이 유니폼은 팀의 모든 선수들에게 배포되었지만, 매 시즌이 끝나면, 중요한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만 보관할 수 있었고, 벤치를 지켰던 나머지 선수들은 반납 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처음에 이 유니폼은 엄청난 가치를 지녔고, 엘리트적이였으며, 매우 권위적이었다
1891년 그들은 경기장 밖에서도 레터맨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고, 이렇게 레터맨 스웨터는 특정 학교와 팀에 소속되어 있다는 선수들의 자부심이 되면서, ‘레터맨’ 풀오버 스웨터뿐 아니라 가디건을 만들게 했다. 가디건이 탄생하면서 일반적으로 학교를 대표하는 이니셜은 왼쪽 가슴 상단으로 옮겨졌다.
10년 후인 1900년대 초반, 하버드의 미식축구 팀도 이니셜 ‘H’를 장식한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는데, 야구팀과 마찬가지로 경기를 하지 않는 선수들은 유니폼을 반납해야 하는 반면, 경기를 뛰고, 특히 대학의 명성을 위해 뛰는 시즌의 가장 중요한 경기(예를 들면, 예일대과 프린스턴대 같은 라이벌전)에 참가한 선수들은 보관할 수 있는 규칙이 있었다.
이때부터 유니폼은 진정한 ‘맞춤화 디자인’이 시작되면서 추가적인 상징들이 더해졌다. 왼쪽 소매에 있는 줄무늬는 승리한 수를 나타내며, 가슴에 꿰매어진 별은 팀의 주장임을 표시했다. 대표 이니셜에 고유한 기호를 사용하여 특정 스포츠나 활동을 나타낼 수도 있었다.
‘레터맨 스웨터’는 곧 각지의 다른 학교 팀들에게도 전파 되었고, 고등학교도 대학 선배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일부 학교는 경기 종목에 따라 이니셜 ‘letter’를 수여하는 자격, 예를 들면, 특정 점수, 안타, 도루, 달리기, 태클,,, 혹은 전체 ½에서 ⅔의 경기 참여 등 기준을 유지하였다. 또는 주 대회나 토너먼트 같은 중요 대회에 참가한 자격에 따라서도 결정되었으며, 코치진 또는 이미 ‘letter’를 수여 받은 선수의 의견을 종합하여 경기력 개선이나 경기 안팎에서의 성과, 스포츠맨 정신에 따라 수여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선수들의 성격, 팀에 대한 헌신, 팀워크 등을 훨씬 더 강조할 뿐 아니라 실제 경기 성적에도 도움이 되었다. 때때로 고등학교에서는 학업 성적도 수여 기준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철학은 다재다능하고 균형 잡힌 선수를 개발하는데 기여하였다. 물론 운동 성과와 경기 성적에만 엄격하게 집중하는 학교들도 있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letterman’의 개념은, 최근에는 일부 학교에서 운동 경기를 넘어 공연, 예술, 학업 또는 기타 학교를 대표하는 활동의 성과로 확장되어, ‘letter’를 수여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시티 재킷의 시작은? 1930년대!
1930년대, 선수들이 추위 속 경기를 위해 더 따뜻한 옷을 요구하면서, 모직 소재의 몸통에 가죽 소매, 셔닐 레터링 패치(chenille lettering patch), 손목과 허리는 밴드로 된 형태를 갖춘, 우리에게 친숙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시티 재킷’이 탄생하였다.
바시티 재킷의 몸통은 일반적으로 학교 대표 색상으로 소매는 보조 색상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남성용의 경우는 밴드가 있는 깃(collar)으로, 여성용의 경우 단추가 달린 후드(단추를 풀면 확장 카라가 되는)가 특징이었다.
왼쪽 주머니 바로 위의 ‘letter’는 여전히 경기에서의 성과를 통해 획득할 수 있었고, 이러한 관습은 미국의 8대 명문 사립 대학인 모든 아이비 리그 대학에 적용되었다. 이 시기에 ‘바시티 재킷’이라는 용어가 탄생하였고, 대학 또는 고등학교의 다양한 거의 모든 종목의 운동 선수가 착용하였다. 소유자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셔닐 또는 재킷 자체에 자수로 표시되었으며, 졸업 연도는 대부분 오른쪽 소매나 오른쪽 주머니 바로 위에 덧대어졌다. 챔피언십 팀에서 뛰는 ‘letterman’은 종종 재킷 뒷면에 챔피언십을 기념하는 커다란 패치를 받았고, 경기에서 받은 메달도 자신의 업적을 표시하기 위해 재킷에 꿰매기도 하였다.
새로 탄생한 바시티 재킷도 여전히 팀에서 뛰어난 선수들을 구별하는 역할을 하였고, 반세기 이상 동안 레터맨 스웨터는 바시티 재킷과 함께 그 역할을 해주었다.이러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지금의 바시티 재킷은 ‘레터맨 재킷(letterman jacket)’ 또는 ‘베이스볼 재킷(baseball jackets)’, 스타디움 재킷(stadium jacket), 어워드 재킷(award jacket)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1900년대 초반까지는 레터맨 스웨터와 바시티 재킷이 남자 운동 선수들 사이에만 인기를 끌었지만, 1950년대가 되면서 소년 소녀 모두에게 고전적이고 상징적인 십대 사이의 트렌드 아이템이 되었다. 소녀들은 페달 푸셔 팬츠(pedal pushers) 또는 푸들 스커트(poodle skirt) 위에 착용하였으며, 남학생들은 대부분 청바지와 함께 착용하였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실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사랑의 상징으로 자신의 재킷을 여자 친구에게 빌려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소녀들은 자신의 뛰어난 남자 친구를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해 자랑스럽게 그것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1972년 의회는 여성 운동선수와 스포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인 Title IX를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여고 및 대학 여자 운동 선수들이 자신의 성적에 대한 성취 그리고 인정에 대한 상징으로 이니셜 ‘letter’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여성 농구, 배구, 소프트볼, 필드 하키, 육상 선수들뿐 아니라 치어리더들까지 자신의 레터맨 재킷에 붙일 수 있는 대표팀 이니셜 ‘레터’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1980년대 바시티 재킷은 미국 프로 스포츠팀에서 불러 일으킨 관심에 힘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팬 상품 제조업체는 프로 야구팀의 서포터를 위한 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팀 로고나 마스코트를 추가하였다. 가격적인 면을 고려하여 양모와 가죽 대신 새틴 버전을 개발하여 재킷의 비용을 낮추어 모든 연령대와 계층의 팬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축구팀 Los Angeles Raiders, 농구팀 New York Knicks, Boston Celtics, Chicago Bulls는 그들만의 버전을 만들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바시티 재킷과 대중 문화와의 만남
프로 팀의 다양한 종목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 팝을 포함한 대중 문화도 바시티 재킷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1983년, Michael Jackson은 "Thriller" 비디오에서 가슴에 "M"이 새겨진 빨간색과 골드색이 매치된 바시티 재킷을 입었고, 그 매력은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여기에 Run-D.M.C.와 같은 힙합 아티스트까지 합류하면서 바시티 재킷은 ‘cool’함이 더해지며 스트리트 아이템이 되었고, 명실상부한 패션 아이템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제 소속이나 운동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바시티 재킷을 즐기게 되면서, 패션계 역시 다양한 브랜드에서 트렌드를 입힌 자신만의 바시티 재킷을 내놓기 시작했다. 1987년, 오늘날 스트리트웨어의 전설적인 제1세대 브랜드 중 하나인 스투시(Stüssy)는 전통적인 양모와 가죽 소재를 사용하여, 대담한 컬러와 스트리트 감성이 담긴 아이코닉한 레터맨 스타일의 홈보이 재킷(Homeboy Jacket)을 출시한다. 그 후, 유명한 래스터 색상(rasta color : 빨강 노랑 초록)으로 가장 많이 팔린 1989 One Love 바시티 재킷을 포함하여, Stüssy는 2010년 Nike 및 Bape와 같은 브랜드와의 협업 등 다른 버전의 바시티 재킷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있다.
네덜란드 브랜드 필링 피스(Filling Pieces)의 설립자인 기욤 필리베르(Guillaume Philibert)는 “사람들은 무언가의 일부가 되어 (그것을) 보여주고 싶어합니다.”라며 “젊은이들이 브랜드(혹은 팀)와 그 가치에 대한 충성을 알리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초기 바시티 재킷의 기원이 “내가 누구인지”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캠퍼스 내에서 “I’m a big man(나는 거물입니다).”를 말해주었듯이, 바시티 재킷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매우 시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Mr. Porter의 스타일 디렉터인 Olie Arnold는 말한다.
Arnold의 말처럼 바시티 재킷은 자신의 소속과 그곳에서 자신의 성과, 역할을 아주 자세하게 효과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내가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바시티 재킷은 입는 것 만으로도 자부심으로 어깨를 하늘로 뿜뿜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을 가진 아이템으로 시작하였으며, 그 역할에 충실하게 여전히 팀을 대표해주는 ‘대표 아이템’으로 사랑 받고 있다.
글 ㅣ 김은영
<필자 소개>
연세대 의생활학과 졸업하고 이랜드 여성캐쥬얼 브랜드 더데이,2Me 실장을 거쳐 로엠 실장 시 리노베이션을 진행하였다. 2008년부터 이랜드 패션연구소에서 여성복 트렌드 분석과 브랜드 컨셉을 담당하였으며, 여성복 SDO를 역임하였다.
현재 트렌드 분석과 메가 스트림 현상, 복식 이야기를 연구,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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