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밀려 왔다. 거센 더위의 여름이 밀려오자, 마침내 거리도 2020년부터 온다했던 Y2K 패션으로 뜨거워졌다. 약속이나 한 듯 트렌드에 민감한 젊음의 거리에는 몸에 밀착된 탱크 탑, 크롭 탑의 행렬이 이어졌다. 트렌드란 정말 사람의 눈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는다. 어제까지와 같은 분명 나의 눈인데, 스타일리쉬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오버사이즈 롱 탑(oversized long top)들은 순식간에 나의 마음에서 멀어지며 촌스러운 물건이 되어 옷장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여름과 함께 우리 곁으로 훅 다가 온 아이템들, 그 중 탱크 탑에 대해, 특히 탱크 탑의 여러 이름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올림픽 게임 여성 수영과 탱크 탑
탱크 탑이란 이름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 처음 도입된 여자 수영 종목에, 27명의 여성 수영 선수들이 입고 등장한, 팔을 과감히 드러낸 여성용 수영복 상반부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당시 남성 수영복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 시대 여성이 입었다는 사실은 세상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이전 여성용 수영복은 팔뚝은 덮여 있었고, 허리둘레에 천이 덧대어져 있어 물에 젖어도 몸의 선이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는 너무나도 보수적인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소재도 다양하게 만들어졌었는데, 두꺼운 모직물이 가장 정숙한 소재로, 물에 젖으면 비쳐 보이는 비단은 정숙하지 못한 소재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하지만, 엘리트 수영 선수들을 위해 물에 들어가면 부풀어오르는 수영복의 부피를 축소하는 것은 경기력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소매가 없는 여성 수영복은 경기에서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팔의 자유로운 움직임과 유연성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결과물이 금메달을 의미한다면 아무리 여성에게 정숙함을 요구했던 시대라 해도 이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탱크 탑은 세상에 충격을 준 여성용 원피스 수영복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지금은 ‘swimming pool’로 더 잘 쓰여지는 수영장은 1920년대 그 당시 용어인 ‘swimming tank’로 불려졌다. 따라서, 한 때 여성 수영복은 ‘탱크 수트(tank suits)라고 불렸으며, 이는 지금 탱크 탑(Tank Top)이라는 이름의 근원이 되었다.
근육(muscle)과 탱크 탑
탱크 탑은 일반적으로 속옷으로 착용되었지만, 팔의 자유로운 가동 범위와, 소매 있는 티셔츠보다 통풍을 원활하게 해 시원함을 유지해주는 능력으로 스포츠에서 자주 사용되었고, 1800년대에는 남자 체조 선수들이 유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처음 착용했다.
이처럼 많은 스포츠 종목, 체조, 농구, 육상 등에서 점차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이 되면서 탱크 탑은 ‘A-shirt’라는 이름도 가지게 되었다. 즉, A-shirt 의 "A"는 "athletic"의 약어인 것이다. 여기에 탱크 탑이 ‘머슬 보이(muscle boys)’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지자 탱크 탑은 근육을 뜻하는 영어 muscle의 ‘M’자를 따와 ‘M-shirt’ 또는 ‘muscle shirt’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렇게 탱크 탑이 머슬 보이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만든 근육들을 보여주는데 효과적인 아이템으로 사랑 받으면서, 탱크 탑은 오늘 날 젊은이들, 특히 잘 발달된 팔, 어깨, 복부 근육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필수 아이템처럼 여겨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속옷으로 출발한 탱크 탑이 체육관 문화가 확산된 1980년대 이후 스포츠 외의 경우에도 단독으로 착용 가능한 진정한 겉옷이 되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탱크 탑이 속옷으로도 착용되고 있지만, 완벽한 언더셔츠(undershirt)의 역할을 해주기에는 실용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속옷의 주요 기능은 신체의 오염으로부터 겉옷을 보호하는 것, 그리고 따뜻함을 제공하는 것인데, 탱크 탑은 표준 언더 티셔츠(흰색 반소매 면 티셔츠)에 비해 겨드랑이에서 나오는 땀과 노폐물로부터 겉옷을 보호해주지 못 할 뿐 아니라 소매가 없기 때문에 따뜻한 기능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탱크 탑은 기능적으로 속옷으로서 부적절하기 때문에 겉옷으로 발전해야 할 운명이었다는 재미있는 주장이다.
이렇게 겉옷으로 진화할 운명도 가졌던 탱크 탑은 아름다운 근육을 가진 젊은이들 덕분에 더욱 더 인기가 높아져 갔고, 1992년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의 최초 남성복 컬렉션에서 탱크 탑을 입은 근육질의 남성 모델들이 런웨이에 서면서 머슬 셔츠(muscle shirt)로서의 자태를 뽐내며 패션적으로도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아내를 때리는 사람(wife beater)과 탱크 탑
반면, 탱크 탑에는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이질적이며 충격적인 ‘wife-beater shirt’라는 무시무시한 이름도 있는데, 이 이름의 배경에는 역사적인 사건이 관련되어 있다. 1947년 아내를 구타하여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디트로이트(Detroit) 출신의 흑인 제임스 하트포드 주니어(James Hartford Jr.) 사건이다. 이 사건은 범죄의 심각성과 충격 때문에 전국적인 뉴스가 되었고, 특히 얼룩진 탱크 탑을 입은 하트포드(Hartford)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으며, 헤드라인의 대부분에서 그를 아내를 때리는 사람(Wife-Beater)라고 부르면서 가정폭력 범죄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또한,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40~50년대의 헐리우드(Hollywood)는 폭력적이고 위험한 특정 부류의 남자들에게 급속히 사로 잡혀 가고 있었다. 그 남자 캐릭터들은 자주 탱크 탑을 입고 있었으며, 그들은 대개 악당이었고, 아내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캐릭터들이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 초 말론 브란도(Marlon Brando) 주연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가 개봉되었고, 그는 탱크 탑을 입고 스탠리 코왈스키(Stanley Kowalski)라는 악역의 캐릭터를 연기했다. 그 밖의 영화들에서도 악역의 남성 캐릭터들이 분노가 격해지면 셔츠를 찢고 땀으로 얼룩진 흰색 탱크 탑을 드러내는 씬(scene)들을 보여주었다. 이는 무성 영화 시대 때 검은 모자를 쓴 사람은 나쁘고 흰 모자를 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했던 것처럼 비열한 남성 캐릭터를 나타내기 위해 영화 속에서 그들에게 헐렁한 민소매 속옷 즉, 탱크 탑을 입혔을 거라는 상징적 의도에 대한 추측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연들로 인해 탱크 탑은 미국에서 구어체로 ‘아내를 때리는 사람(wife beater)’으로도 알려지게 되었으며,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헐리우드가 하트포드(Hartford)의 사건과 더불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탱크 탑의 부정적인 이미지 제공에 일조하기도 했지만, 탱크 탑이 섹시한 겉옷으로 진화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1977)’에서 존 트라볼타(John Travolta), ‘Raging Bull(1980)’의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 그리고 최근 ‘울버린(Wolverine , 2013)’의 휴 잭맨(Hugh Jackman)과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 2013)’의 헨리 카빌(Henry Cavill)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이미지의 변신으로 오늘 날 탱크 탑을 보고 아내를 때리는 사람(Wife-Beater)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탱크 탑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다행히도 말이다.
역사적으로 1920년대 이전에는 공공장소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팔을 드러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이자 재즈의 시대였던 1920년대는 패션 세계에도 혁명을 일으켰다. ‘플래퍼(Flapper)’라 불리는 신여성들이 등장하면서, 여성들은 머리를 더 짧게 자르기 시작했고, 더 노출이 많은 드레스를 입었으며, 춤을 추거나 거리를 걷는 동안 남성 파트너와 손을 잡는 등의 접촉이 가능해지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1912년 여성 수영복의 충격을 서서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하였고, 스포츠에서의 탱크 탑이 가진 기능성은 사랑 받는 아이템이 되게 하였다. 여기에 1970년대를 시작으로 1990년대 스파이스 걸스(Spice Girls)와 같은 유명 인사들의 뮤직 비디오까지, 탱크 탑은 점차 패션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한 겉옷으로의 진화 뿐 아니라 패션적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아이템이 되어 가고 있었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능력을 가진 아이템인데다 연이은 무더위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계절적으로도 본격적인 탱크 탑 시즌이 돌아왔다. 건강과 면역이 필수가 돼버린 요즘, 일명 #오하운(오늘 하루 운동)이 선택이 아닌 자기 관리의 필수가 되어 버린 팬데믹 시대, 여기에 1990년대 Y2K라는 패션 트렌드까지…지금이야말로 탱크 탑이 제대로 머스트 아이템이 되어 돌아왔다.
글 ㅣ 김은영
<필자 소개>
연세대 의생활학과 졸업하고 이랜드 여성캐쥬얼 브랜드 더데이,2Me 실장을 거쳐 로엠 실장 시 리노베이션을 진행하였다. 2008년부터 이랜드 패션연구소에서 여성복 트렌드 분석과 브랜드 컨셉을 담당하였으며, 여성복 SDO를 역임하였다.
현재 트렌드 분석과 메가 스트림 현상, 복식 이야기를 연구,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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