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트 아이템은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TECH 기반의 상품이 아닌 인문학적 감성이 함께 녹아든 상품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 발행,편집자 주>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남 탓이란 말이 있다. 앞 만 보고 달리고 있는 디자인 분야에서는 이런 말을 좀 새겨들을 만하다. 새로운 디자인들이 항상 지나간 디자인을 등 뒤로 보내고, 자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보면 디자인 분야에서도 역사나 시간에 대한 존중이 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게 된 데에는 항상 새로운 것만을 원하는 대중들의 생각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1,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패전국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불세출의 학교가 있었다. 최초의 디자인학교로 잘 알려진 학교인데, 이 학교의 교수였던 마르셀 브로이어는 바우하우스 재직 시절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의자를 남겼다.
바실리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의자. 당시 대량으로 생산되던 금속 파이프를 휘어서 만든 의자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별것 아닌 디자인인 것 같지만, 당시 대부분의 의자들이 무겁고 육중한 나무를 깎아서 만들던 것에 비하면 이 디자인은 진정 천지개벽을 불러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Wassily Chair 1925 Marcel Breuer
지금이야 이처럼 파이프를 휘어서 의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렇게 특이할 것이 없지만, 이 의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파이프를 의자에 도입한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재료부터가 지극히 산업적인 재료여서 가정에 쓰는 물건, 특히 의자에 도입한다는 것은 통념상 어려움이 있었다. 의자라고 하면 단지 앉는 물체가 아니라 집안의 분위기를 만드는 중요한 아이템이요, 무언가 고전적 분위기를 풍겨야 할 것만 같은 가구였다. 그런데 마르셀 브로이어는 이런 의자의 이미지에 금속 파이프와 가죽을 도입하면서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화려한 무늬를 가진 육중한 나무 대신에 가볍고 가공하기 쉬운 파이프로 몸체를 만들고, 그 사이 사이에 가죽을 대어서 그 어떤 의자보다도 더 편하고, 안정되고, 가벼운 의자의 전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속이 빈 스테인레스 스틸은 의자의 육중한 시각적 중량감을 대폭 줄이면서도, 오히려 파손의 위험은 더 절감시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의자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감동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다고 모양이 저렴(?)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요즘으로 치면 애플의 핸드폰 디자인과 같은 정도의 혁신적인 모양이라고 할까. 검은색 가죽과 번쩍이면서도 가느다란 금속성 재질의 어울림은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세련된 이미지였다.
선과 면이라는 지극히 관념적인 형태들을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 질서로 구조화하여 고도의 추상적 조형미를 갖추었다. 이 같은 선적인 재질과 기하학적인 구조의 어울림은 20세기 초부터 만들어진 러시아 구성주의나,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 와 같은 혁신적인 조형운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기능적인 의자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 의자는 조형예술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도의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후로 의자에는 공업적 재료들이 빈번하게 도입되고, 갖가지 조형적 아름다움이 시도되다보니 원래 그런 아방가르드한 시도를 했던 디자인은 이제 그저 그런 디자인으로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더 좋은 디자인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자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길을 만들었던 선구적 디자인의 존재감은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이 의자 이름을 바실리(Wassily)라고 한 것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던 바실리 칸딘스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글 ㅣ 최경원 ,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
<필자 소개>
현 디자인연구소 대표이자 연세대 겸임 교수로 활동 중입니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적 미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홋’이라는 브랜드를 런칭하여 운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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