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주5일제 도입을 앞두고 한국 사회는 술렁였다.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다", "중소기업은 견디기 어렵다", "인건비 부담만 늘어날 것이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그 누구도 토요일 출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제 4.5일제라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제기된 '임금 감면 없는 주 4.5일제' 논의를 두고 또다시 비슷한 우려들이 나오고 있다. HR 전문가들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업종별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며 신중론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똑똑한 경영자들은 이를 기회로 만들고 있다.
시간에서 성과로, 패러다임의 전환
마케터로 근무했던 한 패션 브랜드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브랜드는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를 '집중 업무시간(Intensive working time)'으로 정했다. 이 2시간 동안은 메신저도, 개인 업무도, 심지어 핸드폰도 만지지 않고 오직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반발도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견들이 나왔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단 2시간의 집중 시간이 하루 전체의 업무 효율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마케팅 캠페인 기획이 더 창의적으로 나왔고, 브랜드 전략 회의에서 더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동시에 평일 업무시간 중 4시간을 따로 할애해 직원들이 운동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업무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결과는 그룹사 내 다른 브랜드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드러났다. 직원 충성도는 물론이고, 실제 매출 성과와 브랜드 인지도도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이 브랜드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지원자들이 급증했다. 8시간 내내 자리를 지키게 하는 대신, 진짜 집중이 필요한 시간을 명확히 구분하고 나머지 시간은 직원들의 웰빙에 투자한 것이 주효했다.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있어도 실제로는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짧은 시간이라도 100%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4.5일제가 지향하는 본질이다. 단순히 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많은 경영자들이 여전히 직원들을 눈에 보이는 사무실에 정해진 시간만큼 가둬놓는 것을 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산업화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이다. 정보화 시대를 넘어 AI 시대로 접어든 지금, 물리적 시간과 공간에 얽매인 관리 방식은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MZ세대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언제까지 앉아 있었느냐'보다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4.5일제는 이런 변화하는 가치관에 맞춰 조직을 재설계할 기회를 제공한다.
성과 중심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명확한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 각자가 무엇을 언제까지 달성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 그 다음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다. 회의에 얼마나 참석했느냐가 아니라, 그 회의를 통해 무엇을 결정하고 실행했느냐로 판단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각 직원이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고, 어떤 업무에 최적화되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영업 능력이 뛰어난 직원을 단순 사무업무에 묶어두거나, 창의적 기획 능력이 있는 직원을 반복적인 업무에만 활용한다면 이는 자원의 낭비다. 4.5일제 성공의 핵심은 제한된 시간 안에서 각자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업무를 재배치하는 것에 있다.
모든 직장이 같지 않다
물론 모든 업무에 4.5일제를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제조업 현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직원과 사무실에서 기획서를 작성하는 직원의 업무 특성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4.5일제 도입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직무별, 업종별 특성에 맞는 창의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영진이 조직 내 각 역할과 업무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지식 기반 업무를 하는 직원들에게는 4.5일제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창의성과 집중력이 생산성에 직결되는 이들 업무는 충분한 휴식과 재충전을 통해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낼 수 있다.
반면 고객 접점 업무나 현장 기반 업무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팀 단위 순환 근무나 교대제를 통해 서비스 연속성은 보장하면서도, 개별 직원들은 4.5일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최근 많은 기업들이 재택근무와 성과 중심 업무 전환을 하면서 흥미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기본급을 낮추는 대신, 실제 성과와 필요한 역량에 대해서만 차등 지급하는 구조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을 파는' 구조에서 '가치를 파는' 구조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특히 AI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문서 작성, 데이터 분석, 고객 응대 등 많은 업무들이 AI의 도움으로 자동화되거나 간소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는 만큼'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다.
중소기업이라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규모가 작은 만큼 더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핵심 업무에 집중하고 비핵심 업무는 외부에 맡기거나,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들이 있다. 무엇보다 4.5일제를 인재 확보의 경쟁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기업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를 복리후생으로 보완하는 전략이다.
핵심은 경영진이 단순히 사람을 시간으로 관리하려는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어떤 업무에 어떤 역량이 필요하고, 그 역량을 가진 인력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조합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준비하는 자가 기회를 잡는다
변화는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된다. 4.5일제 도입이 법제화되든 그렇지 않든, 이미 변화의 흐름은 시작되었다.
중요한 것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패션 브랜드에서의 경험처럼 작은 실험부터 시작해보자. 특정 요일 오후를 자유시간으로 주거나, 월 1회 금요일 조기 퇴근을 시행해보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생산성 변화, 직원 만족도, 고객 반응 등을 면밀히 관찰하고 개선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실험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경영진은 이 시대의 트렌드를 깊이 있게 학습하고, 직접 운영해보는 경험을 쌓아야 한다. AI 도구들을 실제로 사용해보고, 원격 협업 플랫폼을 경험해보며, 성과 측정 시스템을 구축해봐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만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과 측정 시스템도 점검해야 한다. 현재 우리 조직이 직원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그 기준이 실제 기여도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더 나아가 각 직원이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고, 어떤 업무에서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단순히 인원수를 채우고 시간을 때우는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필요한 역량과 맨파워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마케팅 역량이 뛰어난 직원을 단순 업무에 묶어두거나, 데이터 분석 능력이 있는 직원을 회의에만 참석시키는 것은 자원의 낭비다.
임금체계도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시간 기반 보상에서 성과 기반 보상으로 전환하되, 직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소통과 합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각 역할의 가치와 기여도를 명확히 정의하고, 그에 맞는 보상 체계를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과의 소통이다. 4.5일제는 일방적으로 도입하는 제도가 아니라, 조직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일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20년 전 주5일제 도입 당시의 우려들이 기우였듯, 4.5일제에 대한 현재의 걱정들도 결국은 극복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느냐, 능동적으로 준비하느냐의 차이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이 시대에, 여전히 물리적 시간과 공간에만 의존하는 관리 방식은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경영진이 먼저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를 학습하고 체험해야 조직 전체가 변화할 수 있다.
변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그 물결을 어떻게 탈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역량을 키우고 어떤 인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결정할 시간이다.
[ 필자소개 ]
심준규. 경영학박사.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 ESG로 성과내는 사람들>,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